장태동의 서울 문학기행
휠체어 노인의 시간에 가을 햇살이 꼿꼿이 내리쬐다
국립 4.19 묘지
등록 : 2016-10-14 03:00
사월 학생 혁명 기념탑
김주열의 죽음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4.19혁명기념사업회가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발행한 <4.19 혁명사>에 따르면 1960년 2월28일 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이 대구 유세에 나섰는데, 이승만 정부는 청중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그날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동회와 직장에서는 행사를 열게 했고, 학생들을 시험, 토끼사냥, 임시수업, 졸업생 송별회, 무용발표회 등을 명목으로 학교에 묶어두려고 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뜻을 막을 수 없었다. 학생들은 시내로 모였고 함성은 높아져만 갔다. 2월28일 대구경북 지역을 시작으로 서울, 수원, 대전, 충주, 청주, 부산, 마산, 진주, 창녕, 하동, 광주, 목포, 춘천, 전북 등 전국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터져나왔다. 같은 해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된 자유당 이승만과 이기붕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팽배했다. <4.19 혁명사>에 따르면 사전 투표에서 총유권자 수보다 투표자 수가 많이 나오자 공무원들이 투표함을 불태우는 일도 있었다. 이 밖에도 대리투표, 공개투표 등 부정한 방법이 횡행했다. 3월15일 마산에서 선거무효를 외치던 사람들 중에 김주열이라는 학생이 있었고, 그는 4월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서울에서는 4월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는 일이 생겼고, 다음 날인 4월19일 거리로 나선 학생과 시민들에게 경찰은 총을 쏘기 시작했다. 시위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승만 정권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일어난 학생과 시민들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1960년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고 시민의 힘으로 일군 민주주의의 초석이 대한민국 헌정사에 놓이게 되었다. 국립 4.19 민주묘지에 놓인 벽시 국립 4.19 민주묘지 경내에 거대한 벽이 6개 있다. 6개의 벽 양쪽 면에 4.19혁명을 노래한 시가 새겨졌다. 조지훈, 박목월, 구상 등 12명이 쓴 12편의 시 앞에서 사람들은 걸음을 멈춘다.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가 박목월의 시 앞에서 멈추더니 휴대폰을 꺼내 시가 새겨진 벽을 사진에 담는다. 박목월은 ‘죽어서 영원히 사는 분들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시에서 ‘참된 뜻만이/죽은 자에서 산 자로/핏줄에 스며 이어가듯이’라는 구절로 영령을 기리고 있다. 조지훈이 쓴 시의 제목은 ‘진혼가’다. 조지훈은 시에서 젊은 혼으로 살아서 조국의 역사를 지켜봐달라고 말한다. 구상은 마산 희생자를 위한 ‘진혼곡’에서 ‘형제들이 뿌리고 간 목숨의 꽃씨야/우리가 기어이 가꾸어 피우고야 말’것을 약속하고 있다. 윤후명은 ‘역사를 증언하는 자들이여 4.19의 힘을 보라’는 제목의 시에서 ‘뜨거운 피의 여울을,/역사를 증언하는 자들이여/그 힘을 보라’고 외친다. 그뿐이랴! <4.19 혁명사>에 그때 학생이었던 사람들이 당시 상황을 쓴 시가 실렸다.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마음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내버스 창밖으로 노을이 피어난다. 집에서 가지고 온 시집을 꺼냈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