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터의 또 다른 주인공은 아이들이 지치기를 기다리는 엄마들이다. 박찬희 제공
놀이터의 주인공은 아이들일까? 물론 그렇다. 그러나 아이들이 전부는 아니다. 또 다른 주인공은 엄마들이다. 가끔 할머니나 더 가끔 아빠까지 포함된다. 아이들은 놀이터에 놀러 나오고, 엄마들은 그 아이들을 돌보러 나온다. 돌보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일단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고 있는지 확인하고 들어갈 시간을 정한다. 아이가 어릴수록 좋든 싫든 같이 놀아야 하는 일이 많다.
놀이터에 나오는 엄마들은 대략 세 가지 모습을 보인다. 놀이터를 둘러싼 화단 벽돌에 홀로 앉는 엄마들은 아이를 일찍 데리고 들어갈 확률이 높다. 놀이터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엄마들은 최소한의 의무방어전만 치른 채 더 빨리 들어간다. ‘너는 놀지만 나는 뭐하는 거니!’라는 한숨 섞인 표정이 역력하다. 마지막으로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아 장기 항전하는 엄마들이다. 아는 엄마들과 함께라면 더 버틸 수 있다. 이야기를 나눌 동료를 만났으니 무작정 아이를 지켜보는 것보다는 덜 지루하다. 가끔은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
엄마들은 아빠들과 달리 흐르는 강물처럼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아빠들은 잘 아는 사이라도 몇 마디 나누고 나면 침묵이 흐를 때가 있지만, 엄마들의 세계에서는 세상의 모든 일이 이야깃거리다. 만약 동네 미용실이 이야기에 오르면, 잘 모르는 사람도 미용실이 몇 개고 누가 머리를 잘하고 누가 불친절한지 어디로 가면 좋은지 금세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고 풍부하다. 인류학자들의 추론대로 끊임없이 정보를 교환해 가족을 지키려 했다는 엄마들의 오래된 유전자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다.
그 옛날 빨래터를 21세기에서 찾는다면 동네 놀이터가 아닐까. 옛날 엄마들은 빨래터에 모여 속 깊은 이야기를 풀어놓거나 그래도 부족하다 싶으면 빨랫방망이를 두드리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만약 김홍도가 오늘날 다시 태어난다면 빨래터 대신 놀이터의 엄마들 풍경을 그리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처럼 엄마들도 나름대로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셈이다.
어떤 즐거운 놀이도 끝이 있게 마련이다. 엄마들은 집안일 상황을 봐가며 들어갈 시간을 정한다. “몇 시에 들어갈 거야!”라며 미리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그 시간이 되면 “이제 들어갈 시간이다”라고 말한다. 만약 밀린 집안일이 별로 없다면 마음이 편하지만, 켜켜이 쌓여 있다면 마음이 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엄마 마음을 알 길 없는 아이들이 하는 말은 늘 같다. “조금밖에 못 놀았다고요!” 조금의 기준이 어찌나 다른지 승강이를 벌이다 엄마를 따라 들어간다.
“우리들은 언제쯤 놀이터에 나오지 않을까?” 엄마들의 푸념 섞인 바람은 대개 아이들이 초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이루어진다. 엄마들에게 놀이터란 어떤 곳일까? 통과의례처럼 의무방어전을 치르는 곳이지만, 아이들처럼 엄마들에게도 삶의 한 자락을 차지한다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을까 싶다.
글 사진 박찬희 자유기고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