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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고 줄인 종로, 사람중심 거리로 탈바꿈

‘비우기 사업’ 보행환경 좋아져 2013년 이후 1만3000건 개선

등록 : 2016-10-27 12:21 수정 : 2016-10-27 12:29
길이 편하면 사람이 모여들고, 사람이 많아지면 모둠살이가 바뀐다. 이제는 걷기 좋은 길로 오롯이 자리 잡은 종로구 인사동에서 외국인 가족과 시민들이 한가로이 거닐면서 옹기종기 들어선 가게와 다양한 풍경을 둘러보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아침 8시40분 광화문광장. 출근길이라 발걸음이 빠른 사람들 사이를 지나는 박범석(44) 씨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박 씨는 도보 출퇴근족이다. 집에서 일터인 종로구청까지는 약 12㎞. 짧지 않은 길이지만 걸어서 다닌 지 벌써 8개월째다. 아침 7시경 은평뉴타운 집을 나서 진관동-구기터널-부암동-서촌을 경유한다. 박 씨가 걸어야겠다 생각하게 된 것은 건강 때문이다. 마음은 간절했지만 따로 시간을 내기는 어려웠다. 박 씨가 차일피일 미루던 걷기를 실천하게 된 계기는 종로구의 ‘도시 비우기 사업’이 마련해줬다.

도시 비우기 사업은 도시 시설물을 비우고, 줄이고, 통합해 보행 불편을 덜고, 도시를 사람 중심으로 최적화하는 도시 정책이다. 2013년부터 시작해 지난달까지 종로구가 줄이고(164건), 비우고(4542), 고친(9068건) 가로시설물을 모두 합하면 1만3774건에 이른다. 서울의 보도에는 그만큼 불필요한 시설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서울에는 공중전화 부스, 분전함, 전신주 등 온갖 시설물이 30여 종 110만 개에 이른다고 한다. 종로구는 2013년부터 ‘사람 중심 명품도시 종로’를 슬로건으로 도시 비우기 사업을 해왔다. ‘건강하고 안전한 종로’를 만들기 위해 보행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문제 의식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종로구는 쉽지 않을 일을 해내기 위해 ‘작은 것부터 천천히’라는 원칙을 세웠다. 감사관실에 도시비우기팀을 새로 만들었다. ‘도시 미리 비우기’라는 이름으로 각 부서가 새롭게 설치할 도시 시설물을 검토해 145개의 시설물을 통합 설치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만큼 보도는 쾌적해졌고 시설 설치비와 유지비 2억 2000여 만 원까지 절약할 수 있었다.

가로시설물 설치와 관리 기관과의 협의를 강화하기 위해 도시비우기협의회도 출범시켰다. 종로구 직원 5명과 경찰서와 한국전력, KT 등 관련 기관 7명이 참여하는 도시비우기협의회에는 보행환경 조성과 도시 경관 관리의 기본계획 수립에 대한 사항을 심의하는 권한을 주었다. 각 기관의 시설물 설치와 운영을 공유해 도시 비우기 사업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하려는 뜻이다. 협의회 산하에는 도시비우기실무협의회까지 둬 검토와 협의 등 보행 환경 개선에 필요한 사항을 협의하도록 했다.

종로구는 2015년 12월31일에는 전국 최초로 ‘종로구 도시비우기사업’ 조례까지 제정했다. 조례는 ‘도시시설물은 통합 또는 지중화, 외부 기관이 시설물을 설치할 때는 종로구와 사전협의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종로구의 노력은 종로를 사람이 중심이 되는 도시로 바꾸는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저녁 무렵이면 종로 도심에서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시민들이 나타나고, 오가며 눈인사를 나누는 풍경이 보이기도 한다.

박 씨는 “걸으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됐다는 것, 생각도 많이 하게 돼 삶에 더 충실할 수 있다는 것”을 걷기의 또 다른 매력으로 꼽았다. 점심시간을 쪼개 직원들과 함께 북촌 일대를 걷는 일도 박 씨의 중요한 일과가 됐다. “함께 걸으며 이러저러한 이야기도 나누니 관계도 좋아져 업무 추진도 잘되는 편입니다.” 걷기가 가져다준 변화는 직장에서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나타났다. “일단 술 안 먹고 귀가하니 집사람이 좋아해요. 휴일이면 아이들과 함께 걷기도 하고요.”

보행 환경 개선 효과는 삶의 질 개선과 함께 골목 경제에도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점심시간이 되면 많은 사람이 산책을 즐기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요. 덕분에 가게 손님도 늘었고요.” 종로구청 앞 음식점 ‘남도미가’ 공덕수 사장은 걷기 편해진 거리에 대해 만족스러워했다.


종로구의 도시 비우기 사업은 ‘2014 대한민국 도시대상’ 국토교통부 장관상, ‘2015 서울시 자치구 행정 우수사례’ 우수상, 세계 최대의 국제환경도시 연합체인 이클레이(ICLEI)가 2016년 발표한 ‘지속가능한 발전 정책’ 등 외부에서도 크게 인정을 받았다.

공중전화 부스가 없어진, 종로5가역 6번 출구 앞 횡단보도를 시민들이 편하게 건너고 있다. 종로구 제공, 장철규 기자

종로구 외에도 서울의 대부분 자치구가 보행환경 개선을 열심히 하고 있다. 장애인 등 교통약자의 이용 편의를 돕는 양천구의 ‘무장애 정류장 설치’, 아이들이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은평구의 ‘아마존 조성’, 이면도로에 주차구역을 철거하고 보행 공간을 확장하는 마포구의 ‘생활권 도로 다이어트’, 걸으며 즐길 수 있도록 골목을 정비한 용산구의 ‘테마거리 조성’ 등은 보행권 보장을 통해 서울을 자동차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꿔나가려는 노력들이다.

김정엽 기자 pkjy@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