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섬 폭파 희생 덕에 ‘값 없던’ 여의도 ‘값 높은’ 땅 되다

서울을 변화시킨 10대 사건 ② 1968년 밤섬 폭파와 여의도 개발

등록 : 2023-02-09 16:03 수정 : 2023-02-09 17:00

서강대교 중간쯤 위치한 자연섬 밤섬

배 만드는 사람들 삶의 터전 됐던 곳

윤중로 쌓기 위해 주민 이주 뒤 폭파

‘너나 가져라’던 여의도에 새 땅 조성돼


‘국회 서쪽, 대법원 동쪽’ 구상 세워지고

택지 매각 통해 고급 아파트 자리 잡아


방송 이어 금융기관 모여 ‘메카’ 형성

폭파된 밤섬도 부활, ‘람사르 습지’ 돼

마포구 창전동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잇는 다리가 서강대교다. 그 중간쯤에 밤섬이 있다. 1968년 초까지 이곳은 본래 조선 초부터 배를 만드는 사람들이 17대를 이어 살아왔다. 밤섬 주민은 마(馬), 판(判), 석(石), 인(印), 선(宣) 등의 무척 드문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여의도의 제방 건설을 위해 이들을 강 건너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그해 2월10일 밤섬을 폭파해버렸다.

밤섬의 희생으로 여의도는 새롭게 탄생했다. 그 이전의 여의도는 잉화도(仍火島), 나의도(羅衣島), 여의도(汝矣島) 등으로 불렸는데, 유래는 넓은 섬이라는 뜻의 ‘너벌섬’이었다. 하지만 여의도의 ‘여’자가 ‘너 여’(汝)인 점을 들어, ‘너의 섬’ 즉 ‘너나 가져라’란 뜻으로 민간에서 해석할 만큼 큰 쓸모가 없는 땅이었다. 왜냐하면 장마철 한강 수위가 높아지면 섬 대부분이 물에 잠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부터 비행장으로 사용됐을 뿐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① 여의도 동고서저의 원인 국회의사당

그런 상황에서,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1967년 여름 제1한강교에서 영등포 입구까지 제방도로를 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현옥의 생각은 한강변 제방을 쌓아 홍수에 대비하고 김포공항~워커힐호텔 간 교통소통에도 도움이 되게 할 생각 정도뿐이었지 ‘한강 개발’이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 모습을 갖춰가자 뜻밖에 제방 안쪽으로 택지가 생기는 것을 보게 됐다. 이러한 아이디어에서 당시 급증하는 서울 인구와 부족한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부이촌동을 개발했고 또 여의도를 서울의 부심으로 개발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의도로 범람하는 한강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을 돌과 흙이 필요했다. 밤섬은 바로 그 돌과 흙을 위해 폭파됐다. 결국 우리가 윤중제라 부르는 여의도 제방은 밤섬 그 자체인 셈이다.

이렇게 시작된 윤중제 공사는 그해 6월1일 박정희 대통령이 40만3001번째 마지막 화강암 블록을 덮은 보자기를 벗김으로써 준공식을 거행했다. 참고로 이것으로 생긴 여의도 윤중로에 심어진 벚나무들은 1971년 재일동포가 기증한 것과 1981년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하면서 그곳에 있던 벚나무들이 옮겨진 것이다.

② 동고서저로 층수 낮아진 KBS

이렇게 생긴 여의도 87만 평의 땅을 서울의 부심으로 개발하기 위해 김현옥은 건축가 김수근에게 그 설계를 맡겼다. 김수근은 자신의 일본 스승 단게 겐조(1913~2005)의 ‘도쿄계획 1960’을 떠올리며 그것을 모방하려 했다. 또한 시청과 대법원을 동쪽으로, 국회를 서쪽으로 이전시켜 명실상부한 부심으로 만들고 서울 도심~여의도~영등포~인천을 연결하는 이른바 선형계획을 염두에 두고 여의도를 개발하려 했다. 하지만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여의도시범아파트 건설, 박정희 대통령의 ‘여의도 5·16광장 건설 지시’ 등으로 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마침 1969년부터 서울시 주택보급 사업으로 건설된 시민아파트 가운데 하나인 와우아파트가 붕괴해 그 책임으로 김현옥 시장이 물러나고 철도청장 등을 지낸 양택식씨가 1970년 새로운 시장으로 취임했다. 여의도에 건물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선 시기는 양택식 시장의 재임 기간 중이었다.

③ 여의도시범아파트

당시 서울시 재정은 거의 바닥 수준이어서 양택식 시장은 여의도 개발로 생긴 택지를 매각할 계획이었다. 양 시장은 그 방법의 하나로 그곳에 고급 아파트를 지어 매각하기로 했다. 전임 시장의 ‘저가 아파트 건설=와우아파트 붕괴’라는 이미지도 지우자는 것이며 여의도에 주민을 정착시킴으로써 여의도 발전의 교두보로 삼겠다는 의미였다.

그 건립 위치는 김수근에 의해 수립된 ‘1968년 계획’에서 대법원지구와 시청지구로 계획됐던 곳이었다. 이렇게 건설된 것이 여의도시범아파트다. 이것이 그야말로 고급 아파트, 고층 아파트의 ‘시범’을 창출했고, 여의도 발전의 교두보가 돼 60만 평에 달하는 여의도 택지를 매각하는 전기를 가져왔다. 이로써 서울시 재정도 호전되기 시작했다.

④ 다시 살아나는 밤섬.

시범아파트는 중앙공급식 난방과 엘리베이터가 달린 국내 최초 아파트며, 서울시는 교육위와 교섭해 학생들은 그곳에 위치한 여의도초등학교-여의도중학교-여의도고등학교로 무조건 진학하도록 특수학군까지 설정했다. 이렇게 고급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면서 당시 입주자 어머니의 70%가 대졸이었으며, 여의도동의 동장도 국내 최초로 여성이 맡았다.

이러한 시범아파트의 성공으로 1974년 삼익아파트와 은하아파트가 설립되고 1975년에 대교아파트와 한양아파트 등 민간아파트들이 건립되면서, 마침내 지금의 대규모 여의도 아파트 단지가 형성됐다.

시범아파트 건립 이후 또 순복음교회(1974)와 국회의사당(1975)이 들어섰을 뿐 아니라 (1976), (현 2TV, 1980), (1982), (1991) 등이 입주함으로써 방송의 메카가 됐다.

한편 일제강점기부터 중구 명동에 있던 증권거래소가 1979년 여의도로 이전함으로써 한국 금융가를 을지로에서 여의도로 옮기게 하였다.

⑤ 마포대교에서 바라본 여의도.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여의도광장을 기준으로 동여의도와 서여의도 두 곳의 스카이라인이 현저히 다르다는 것이다. 본래 여의도광장과 대도로 변에는 15층 이상 고층건물을 세우도록 계획돼 있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회때문에 차질이 빚어졌다. 국회에서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처럼 주변 건축물을 국회의사당보다 높게 짓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행정수도인 워싱턴 사례를 복합기능을 가진 서울시에 적용하는 건 잘못됐지만, 어쨌든 서울시는 이로써 서여의도에 신축되는 건물 높이에 대해서는 지상에서 40m로 제한해버렸다. 이 때문에 제일 먼저 희생된 것이 본관이었다. 본래 15층으로 설계됐지만 이런 건축 규제의 변화로 1976년 준공될 때는 7층의 지금 모습으로 우리에게 선보였다. 결국 당시 서울시가 국회 요구에 굴복함으로써 지금의 여의도 스카이라인이 만들어졌다.

⑥ 둔덕처럼 보이는 윤중제.

참고로 여의도 개발을 시작한 김현옥 시장은 1970년 4월16일에 퇴임했는데, 퇴임 한 달 뒤인 5월16일 마포대교 준공식이 있었다. 마포대교는 김현옥 시장이 여의도 개발을 위해 착공했는데, 김현옥은 쓸쓸히 차를 타고 혼자 이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

이렇게 밤섬의 희생 아래 ‘쓸모없는 땅’ 여의도는 ‘서울의 가장 비싼 땅 중 하나’가 됐다. 밤섬은 그 폭발로 ‘쓸모없는 땅’이 됐지만 최근 다시 살아나고 있다. 자연의 마법을 통해 해마다 평균 4400㎡씩 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서울시는 1999년 이곳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했고, 2012년에는 ‘람사르 습지’로 공식 지정됐다. 도시 개발을 위해 자연섬을 폭파한 인간의 욕망과 말없이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대자연의 힘을 보면 많은 것이 떠오른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그림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