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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사각지대’였던 원로·청년 예술가, 새 무대의 꿈을 키우다

등록 : 2023-02-23 14:54
서울문화재단(대표 이창기)이 올해 새롭게 진행한 ‘원로예술지원’과 ‘청년예술지원’ 선정자인 정예진 가야금병창 전승교육사(가운데)와 박효정 직조회화공예 작가(오른쪽)가 지난 16일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나타냈다. 서울문화재단의 김수현 예술지원실장(왼쪽)은 “원로예술지원과 청년예술지원은 서울시의 ‘약자와의 동행’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문화재단, 올해부터 ‘원로·청년 예술지원’ 시작

서울시의 ‘약자와의 동행’ 발맞춰…지원 사각 최소화

“연세가 많으신데도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셔서 존경스럽습니다. 건강하게 더욱 오래오래 활동하셨으면 합니다.”(박효정(27) 직조 회화공예 작가, 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지원’ 선정자)

“젊은 후배 예술인을 만나니 너무 반가워요. 앞으로도 쭉 ‘내가 선구자다’라는 마음으로 새로운 예술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정예진(65) 가야금병창 전승교육사, 서울문화재단 ‘원로예술지원’ 선정자)

‘원로 선배’를 대하는 청년 예술인 박효정 작가의 태도는 깍듯했고 ‘청년 후배’를 대하는 원로 예술인 정예진 전승교육사의 말에서는 따뜻함이 묻어났다. 지난 16일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센터에서 만난 두 사람은 첫 만남인데도 살갑게 서로를 대했다.

40살 가깝게 나이 차이가 있고, 예술분야마저 다른 두 사람을 이렇게 한자리에 모은 건 서울문화재단(대표 이창기)이다. 두 사람은 재단이 올해 처음 시행한 ‘청년예술지원’과 ‘원로예술지원’ 사업의 선정자다.

두 사람과 자리를 함께한 서울문화재단의 김수현 예술지원실장은 “그동안 재단에서 진행한 예술지원사업은 ‘신진-유망-중견의 3단계 지원체계’였다”며 “그러나 올해부터는 이를 ‘청년-신진-유망-중견-원로의 5단계 지원체계로 세분해 더욱 촘촘히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문화재단이 이렇게 지원체계를 5단계로 늘린 것은 서울시의 ‘약자와의 동행’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청년’과 ‘원로’를 따로 떼어냄으로써, 기존 3단계 예술창작활동 지원체계에서 포괄하지 못한 ‘지원의 사각지대’를 좁히겠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원로’의 경우 이전에는 ‘중견’에 포함돼 지원했다”며 “이 경우 원로들이상대적으로 선정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가령 2021년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60살 이상 예술인은 전체 예술인 22만 명의 약 30%를 차지한다. 하지만 2022년 기준 서울문화재단의 예술창작활동 지원 선정자 중 60살 이상의 비율은 10% 미만이었다. 김 실장은 “80살 이상 등 나이가 많을수록 기회가 줄어든다”며 “원로예술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제자 그룹과 경쟁해야 했다”고 말했다.

반면 올해 처음 시행된 ‘원로예술지원’의 경우 “서울에서 예술 활동을 하는 최소 25년 내외 경력을 가진 만 60살 이상의 원로예술인”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지난해 12월 공모하자 560명의 원로예술인이 몰렸다. 4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최고령 90살 작가 등 140명이 선정됐다. 선정된 원로예술인에게는 별도의 정산증빙 없이 시상금 방식으로 300만원이 지원된다.

김 실장은 “이번에 선정되신 원로예술인 중에는 여전히 활동을 이어가시는 분도 계시지만 경력이 단절되신 분도 적지 않다”며 “이분들이 이번 선정을 계기로 작품을 새롭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셔서 ‘원로예술지원’의 의미가 더욱 살아나는 것 같다”고 했다.

올해 함께 신설된 ‘청년예술지원’의 경우도 이전까지는 ‘신진’에 포함됐던 ‘청년’을 분리해낸 것이다. 신진예술지원은 ‘첫 활동 이후 5년이 안 된’ 젊은 예술가가 지원 대상이다. 하지만 신진예술지원 선정 심사지표를 보면, ‘과거 활동내역’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첫 전시나 첫 공연 등 과거 활동내역 자체가 없는 청년예술가는 과거 활동내역이 있는 신진 예술가와 견줄 때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다. 이에 따라 일부 청년예술가는 첫 전시 등을 자비로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청년예술지원’은 이렇게 지원 사각지대에 놓인 ‘갓 졸업한 예술전공자’ 등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들이 첫 작품을 발표해 데뷔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원 대상도 ‘예술인으로서 데뷔와 첫 작품 발표를 준비 중인 만 39살 이하 예술인’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김수현 예술지원 실장은 “청년예술지원은 이를 위해 창작지원금 최대 1천만원과 함께 전문가 멘토링, 워크숍, 상호 네트워킹 등 간접지원을 통해 첫 예술 활동을 다방면으로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사각지대에 놓인 청년예술가가 적지 않았다는 것은 지난해 10월 신청을 받은 결과 ‘청년예술지원’의 경쟁률이 13 대 1로 매우 높았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정예진 전승교육사와 박효정 작가는 바로 이런 ‘원로예술지원’과 ‘청년예술지원’의 첫 선정자로 만났다.

정 전승교육사는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 산조와 병창 전승교육사다. 전승교육사란 준보유자 자격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을 위한 교육을 하는 사람이다. 정 전승교육사는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민요를 부르는 ‘가야금 병창 민요 부문’에서 활동하며 제자들을 길러왔다.

정 전승교육사는 1964년 궁중무용의 명인인 김천흥(1909~2007) 선생님에게 전통무용을 배우면서 전통예술에 입문했다. 1967년부터는 향사 박귀희(1921~1993) 명창을 만나 가야금 병창을 사사했다. 이후 1988년부터 본인의 가야금 병창 전수소를 열어 후학 양성의 첫걸음을 내디뎠고 1998년 제자들과 함께 ‘줄소리노래소리’를 만들어 이후 해마다 발표회를 열고 있다.

‘원로예술’, 최고령 90살 작가 포함 140명에게 300만원 지원

정예진 가야금병창 전승교육사.

박효정 직조회화공예 작가. 두 사람은 “‘원로예술지원’과 ‘청년예술지원’이 확대돼 내년에는 지원 사각지대에 있는 더 많은 예술가에게 기회가 갔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청년예술’, 첫 작품 발표 도와 데뷔 지원

발표도 1월 초로 당겨 “연간 계획 도움”

“내년에는 더 많은 원로·청년 지원 기대”

정 전승교육사는 “선정됐다는 소식에 매우 기뻤다”며 “특히 ‘원로’라는 말이 너무 좋았다”고 했다. 또 “인기 종목이 아닌 영역의 원로예술인은 생활이 매우 힘들고 제자를 모으기도 힘들다”며 “그동안의 활동을 평가해주는 것 같아 ‘원로예술지원’ 신설 소식이 반가웠다”고 말했다.

박효정 작가는 직조라는 공예적 매개를 통해 회화 작품을 만드는 작가다. 캔버스 위에 페인팅을 하는 일반 회화 개념이 아닌 천을 짜는 직조로 회화를 만든다. 예로부터 내려오던 ‘조각보’와 같이 기존의 제직물을 이어 붙여서 그림이 되는 회화 작업과도 차이가 있다.박 작가는 추가 가공 없이 제직 기법만으로 작품에 회화적 성격을 부여하는 방식을 추구해왔다. 이를 위해 제직을 위한 도안 작업을 면밀히 구상한 뒤 베틀로 작품을 짜나간다.

박 작가는 더 나아가 이런 직조회화 작품을 일관되게 ‘움직임’이라는 주제로 표현하고 있다. 박 작가는 이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며 주체성을 갖고 ‘움직이는 인간’에 대한 존경심을 전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박 작가는 “2017년 직조를 처음 접한 뒤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며 “13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청년예술지원 대상으로 선정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지난 1년 동안 밥 먹고 작업만 한 것이 나름의 성과를 낸 것 같아 뿌듯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처음 도입된 ‘청년예술지원’은 저처럼 활동 기간이 길지 않고 아직 전시회를 못해본 청년예술가에게는 너무도 좋은 프로그램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두 사람은 또한 선정 발표 시기에도 만족감을 표시했다. 서울문화재단은 예술지원 선정자 발표를 지난 1월 초에 했는데, 이는 보통 2월 말에 진행하던 이전 연도 발표일보다 1.5개월 빨라진 것이다.

기존처럼 2월 말 발표될 경우, 예술가들은 서울문화재단에 지원한 작품 등을 한 해 계획에 넣기가 모호했다고 한다. 새해가 된 지 2개월이 지난 뒤에야 선정 여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는 발표가 1월 초로 앞당겨지면서 한 해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은 올 한 해 계획 속에 서울문화재단 ‘원로예술지원’과 ‘청년예술지원’ 프로그램을 온전히 녹여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정예진 전승교육사는 올해 지원금으로 받은 300만원으로 ‘가야금 병창 민요’ 음원을 만들어 쇼케이스도 열고 온라인에도 올릴 생각이다. “가야금 병창에 대한 여러 음원이 있지만, ‘가야금 병창 민요’는 유튜브나 다양한 음악사이트에서도 찾는 게 쉽지 않습니다. 가야금 병창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관련 자료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 실정입니다.” 그는 이에 따라 올해 가야금 병창 스승인 박귀희 선생님 편·작곡을 포함해 본인이 직접 작사·작곡·편곡한 민요들까지 67곡의 다양한 민요를 총 4개의 시리즈 음원으로 제작할 계획이다.

박효정 작가는 올가을 이후 갤러리를 대관해 자신의 첫 개인전을 열 생각이다. 이를 위해 연초부터 전시될 작품 제작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박 작가는 이 과정에서 서울문화재단이 지원하는 멘토 제도와 네트워킹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 사람은 청년과 원로를 대상으로 하는 지원제도가 앞으로 더욱 확대됐으면 하는 바람도 나타냈다.

정예진 전승교육사는 “원로예술인들의 바람은 건강할 때 한 번이라도 더 무대에 서는 기회를 얻는 것”이라며 “내년에는 더욱 많은 원로예술인이 저처럼 활동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효정 작가도 “올해 최선을 다해 멋진 전시회를 열어서 ‘청년예술지원’ 제도가 좋은 평가를 받고 확대되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고 했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