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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갈등 넘어 ‘맨발걷기 성지’로…개운산 공원의 대변신

등록 : 2023-03-23 14:43 수정 : 2023-03-23 14:44
성북 주민의 대표 여가 공간인 개운산 공원이 대학 기숙사 건립, 인조잔디 구장 조성 등으로 생긴 갈등을 넘어 상생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정상에 있는 운동장 재조성 사업에서는 주민들의 의견을 수용해 펜스를 치지 않고 흙길을 살렸다. 기숙사 부지 일부는 성북구가 서울시와 함께 토지보상을 하고 공원으로 조성해가고 있다. 지난 10일 개운산 맨발걷기연대 동호회 회원들과 성북구청 공원기획팀원들이 함께 오솔길을 걷고 맨발을 모아 들어 올리며 활짝 웃고 있다.

성북구, 지난해 인조잔디 구장 조성 때 이용 주민 반발하자

펜스 안 치고 흙길 살리는 등 요구 수용해 ‘상생 공간’ 만들어

“흙의 감촉이 발로 전해져 기분이 참 좋아요.”

지난 10일 오후 성북구 개운산 공원 정상에 있는 운동장. 트랙 밖 흙길을 맨발로 걸으며 권오혁(55)씨가 웃으며 말했다. 개운산 맨발걷기연대 총무인 권씨는 이날 회원 40여명과 동호회 공간 ‘맨발하우스’ 이용 첫날을 기념해 조촐한 행사를 치르고 맨발걷기를 했다. 성북구청의 공원녹지과 공무원들도 함께 걸었다.

운동장 마사토 흙길을 한 바퀴 돈 뒤 이들은 숲속으로 장소를 옮겨 오솔길 맨발걷기를 이어갔다. 발바닥의 모든 부위가 땅과 닿도록 천천히 느릿느릿 걸었다. 박진순(69) 개운산 맨발걷기연대 회장은 “도심에서 맨발로 걸을 수 있는 땅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이렇게 집 가까이에 맨발로 걸으며 치유할 수 있는 땅이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라고 했다.

성북 주민의 대표 여가 공간인 개운산은 종암·안암·돈암동 일대에 걸쳐 있는 해발 134m의 야트막한 산이다. 전체 면적은 43만 6070㎡. 축구장(7140㎡) 61개를 합친 크기로 꽤 넓은 편이다. 절반 정도가 근린공원이고 나머지는 도시자연공원구역이다. 3.4㎞의 둘레길도 있고, 경사가 완만하고 접근성이 좋아 해맞이 행사와 축구, 족구, 게이트볼 등 여러 종목의 체육시설을 이용하는 이도 많다. 맨발걷기, 산책 등 하루 300여 명의 주민이 일상적으로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평화로운 개운산 공원에 10년 동안 이어진 해묵은 갈등이 있었다. 2013년 무렵 고려대가 소유한 공원 터의 일부(3만2090㎡, 배드민턴·테니스장 등으로 사용 중)에 기숙사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주민 1만5천 명은 기숙사 건립을 반대하며 공원 보존을 주장했다. 반면 고려대 총학생회는 기숙사를 계획대로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며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양측의 갈등이 깊어졌고 지루한 갑론을박 끝에 성북구는 서울시와 협력해 장기 미집행 도시공원 용지에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토지보상을 진행했다. 그동안 고려대의 소송 제기 등 난관도 있었지만, 지난해 4월 대법원 판결로 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구는 배드민턴장, 테니스장 등 기존 공원경관 훼손시설을 정비하고 녹지를 복원해 주민 휴식공간으로 조성하는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구비를 마련해 흙먼지 등으로 민원이 있던 운동장 재조성 사업도 더해 함께 추진했다.

동호회 회원들이 운동장 흙길을 맨발로 걷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운동장 재조성 방식을 두고 또 다른 갈등이 생겼다. 구가 계획한 인조잔디 운동장에 대해 집단민원이 제기된 것이다. 구는 인조잔디를 깔고 트랙을 따라 펜스를 세워 복합운동공간을 만들 계획이었다. 김성기 공원기획팀장은 “이용자들 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안전 문제도 있고, 흙바닥 때문에 먼지로 인한 민원도 있었다”고 했다.

집단민원인 다수가 권오혁씨를 비롯한 맨발걷기 애호 주민들이었다. 재조성 사업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펼침막을 내걸고 피켓시위도 했다. 반대 서명엔 두 달 동안 주민 약 800명이 참여했다. 성북구청 공원기획팀이 갈등 해결에 나섰다. 주민대표들을 10여 차례 만나며 합의점을 찾아갔다. 결국 펜스를 치지 않고 인조잔디 구간 외 흙길을 살리는 것으로 협의가 이뤄졌다. 김성기 팀장은 “면담과 의견 수렴 과정이 힘들었지만, 주민 뜻을 반영해 복합운동공간을 조성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운동장 재조성사업은 지난해 11월 마무리됐다. 인조잔디 구장, 족구장, 농구장이 각 1면씩 들어섰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다양한 연령대의 주민들이 운동장을 찾았다. 권오혁씨는 “인조잔디를 깐 뒤 아이들이 축구나 운동을 하러 더 많이 와 다행”이라며 “구청이 맨발걷기에 좋은 마사토 흙길을 조성해줘 감사하다”고 했다.

개운산 맨발걷기연대 동호회 회원은 100여 명이다. 연령대는 40~90대로 폭넓다. 부모나 가족과 함께 참여하는 20~30대도 있다. 자영업자, 직장인, 주부 등 하는 일도 다양하다. 지난해 운동장 조성 사업 반대 운동 과정에서 기존 모임이 활성화하면서 카카오톡 단체대화방도 만들었다. 카톡으로 소통하며 각자 여건에 맞춰 맨발걷기 활동을 한다. 권오혁 총무는 “고정회비도 없고 돈 드는 게 없는 게 맨발걷기 모임의 장점”이라며 “행사비는 때마다 십시일반 모아서 마련한다”고 했다.

“운동장 흙길부터 솔향 가득한 오솔길까지…맨발 걷기에 최적”

개운산 맨발걷기연대 동호회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공원관리를 해 왔고, 지난 2월부터는 성북구청과 자원봉사 협약을 맺어 환경정화 활동을 이어간다. 지난 10일 박진순 회장이 숲속에서 비질로 낙엽을 쓸어내고 있다.

맨발걷기 주민 100여명 동호회 꾸려

청소, 숲길 관리, 꽃 심기 등 봉사도

구, 지난달 협약 맺어 공원관리 ‘맞손’

이날 기자와 만난 회원들은 이구동성 맨발걷기 예찬론을 펼쳤다. 맨발걷기로 나빠졌던 건강이 좋아진 경험을 돌아가며 얘기했다. 불면증, 수족냉증부터 신경통, 당뇨, 고혈압, 암까지 다양한 병에서 개선 효과를 봤다고 했다. 위장 장애로 오랫동안 고생했던 김정수(70)씨는 “맨발걷기 3개월 만에 처음으로 배고픔을 느꼈다”며 “맨발걷기는 천연소 화제다”라고 했다. 정문영(55)씨는 낙상으로 재활 치료를 오랫동안 했다. 하루 2~3시간씩 맨발걷기를 시작한 뒤로는 병원을 더는 다니지 않는다. 정씨는 “맨발걷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워 꼭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동호회 회원들은 개운산을 ‘맨발걷기의 성지’라 부른다. 권 총무는 무엇보다 정상에서 보는 멋진 경치를 꼽았다. 그는 “맑은 날에는 북한산과 도봉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고 일출과 일몰이 정말 아름답다”며 “서울에서 이렇게 좋은 경치를 감상하며 맨발걷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자랑했다. 운동장과 오솔길(둘레길) 둘 다 있어 더운 여름엔 운동장, 추운 겨울엔 오솔길을 걸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정씨는 “오솔길 코스가 대여섯 개 있는데 그날그날 컨디션 따라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소나무가 많아 솔향에 좋은 기운도 느껴진다는 회원도 있었다.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고 맨발로 걷다 보니 회원들은 자연스럽게 공원 정화 활동에 나선다. 산책로를 쾌적하게 걸을 수 있도록 청소하거나, 비 올 때는 물길을 만들기도 하고 흙 계단이 허물어지면 돋워놓는다. 벤치나 운동기구 등 시설물이 망가졌거나 쓰러진 나무 등을 보면 구청에 연락해주기도 한다. 회원인 설봉 스님은 “비 온 뒤 유리나 돌이 많은데 잘 치우고, 물길도 정비하면서 길을 잘 다듬기도 한다”고 했다.

맨발걷기연대 회원들은 활동을 더 다양하게 해나갈 계획이다. 설봉 스님이 중심이 돼 지난해 야생화 구절초를 심었다. 올해는 국화를 심을 예정이다. 설봉 스님은 “올가을에 개운산은 꽃밭이 될 것”이라며 “도시에서 보기 힘든 야생화가 피면 더 걷기 좋아질거다”라고 말했다. 맨발걷기 프로그램 운영도 해볼 참이다. 권 총무는 “맨발걷기로 건강해진 사례가 무궁무진하다”며 “구와 잘 협조해 발전시켜가고 싶다”고 했다.

지난 2월 개운산 맨발걷기연대 동호회는 성북구청과 공원관리 자원봉사활동 협약을 맺었다. 김성기 공원기획팀장은 “사유지 등 구청의 관리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을 맨발걷기연대 회원들이 알려줘 안전사고 예방에 큰 도움을 준다”며 “이용 주민과 구청이 공원을 함께 관리하면 더 효과적일 거라 기대한다”고 했다. 성북구는 둘레길 안 청소 도구함을 만들어주는 등의 지원도 할 예정이다.

협약식 때 맨발걷기연대 회원들은 성북구청에 감사패를 전달했다. 박진순 회장은 “훼손된 녹지를 친환경적으로 복원해줘 맨발걷기나 산책 등을 할 수 있게 주민들의 여가공간을 넓혀줘 감사하다”고 회원들의 마음을 전했다. 감사패를 받은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개운산이 맨발걷기의 성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관리해 많은 구민에게 건강과 치유를 안기는 공간이 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화답했다. 구는 내년 토지보상 부지 공원 조성 때 일부 구간에 맨발걷기에 좋은 황톳길을 만들 계획이다.

글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