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의 대표적인 ‘백제계’ 히라노신사의 도리이. 요즘 교토시민들에게는 벚꽃 명소로 유명하다. 다양한 수종의 벚나무가 400여 그루 있다.
794년에 건립된 대표적인 백제계 신사
당시 왕이 어머니 모시던 신사 옮겨와
4위의 신 모두 백제왕 또는 ‘백제계’
지금은 교토에서 손꼽히는 ‘벚꽃동산’
주신 이마키=‘이제 막 온 백제 기술자’
‘굴뚝 신’인 구도신은 백제 구수왕 추정
교토 천도 간무왕, “주몽-무령왕 후예”
“하백의 후손” 어머니 무덤 지금도 남아
필자가 사는 교토시 북구에 ‘히라노’라는 신사가 있다. 교토가 수도가 된 서기 794년 당시 일본왕 간무(재위 781~806)의 명으로 창건된 유서 깊은 신사다. 요즘은 밀도 높게 심어진 400여 그루 벚나무가 일제히 꽃을 피우는 벚꽃 명소로 이름이 높다. 산책코스의 하나였던 이 벚꽃 신사가 필자의 역사답사 현장이 된 것은 <교토 속의 조선>(박종명 편저, 1999)이란 책을 발견하면서였다. 총련계로 여겨지는 동포 세 분이 교토 시내에 산재한 한국 관련 역사 유적을 샅샅이 찾아내 쓴 책이다(노고에 감사드린다). 동네에서 좀 떨어진 중고서점에서 선 채로 ‘히라노신사와 백제’ 편을 읽고는 곧장 신사를 달려갔던 기억이 새롭다.
히라노신사는 교토의 대표적인 ‘백제계’ 신사이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발언이 있다. 2001년 당시 일본 아키히토 국왕이 68살 생일 기자회견에서 “간무 덴노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역사(<속일본기>)에 기록된 사실에서 한국과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말한 것이다.
당시 일본 우파 언론들은 이 발언을 보도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 뜻이다. 사실(史實)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발설해서는 안 되는 일종의 ‘금기’를 왕 자신이 건드렸기 때문이다. 히라노신사는 아키히토 국왕이 깊은 인연을 느낀다고 한 간무왕의 어머니 다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와 깊은 인연이 있는 신사이다.
아무튼 이런 히라노신사의 내력을 알거나 관심을 가지는 일본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아직도 나무판자로 안내문을 만드는 교토에서는 보기 드물게 첨단(?) 터치스크린 안내판을 설치한 히라노신사 쪽도 이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히라노신사 본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수양버들벚꽃. 가을에서 봄 사이에 피는 ‘시월사쿠라’라는 특이한 벚꽃도 그 옆에 있다.
한국인이 히라노신사를 이해하는 포인트는 두 가지다. 모시는 신의 성격, 그리고 신을 모신 사람이 누구냐이다.
히라노신사는 이마키, 구도, 후루아키 그리고 히메라는 이름의 네 신을 모시고 있다. 신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마키는 원기활력의 신, 구도는 생활안정의 신, 후루아키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신, 여신 히메는 생산력의 신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의미는 후대에 붙여진 것이고 원래는 실존했던 인물을 신으로 기린 것이다.
우선 신사의 주신 격인 이마키 신을 살펴보자. 이마키의 한자 ‘今木’은 본래 같은 발음의 ‘今來’(이마키)이다. <일본서기> 웅략 7년조에 백제에서 막 도착한 사람을 두고 ‘금래(今來)의 재기(才伎)’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일본 발음으로 ‘이마키 노데히토’이다. ‘최근 백제에서 온 기술자’라는 뜻이다. 같은 웅략조에 나오는 새 신(新) 자도 ‘이마키’라고 읽는다. 즉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이제 막 백제에서 온 사람”이 이마키인 것이다.
히라노신사 본전. 히라노신사는 궁 밖의 궁중신사이기 때문에 방향이 동쪽을 향하고 있다. 4개의 신전이 2개씩 붙은 형태로 세워져 있다. 일본 중요문화재.
<교토 속의 조선>에 따르면, 야마토 지방의 금래군(현 나라현 고시군)에 모여 살던 백제인들의 신이 이마키였고 그 이마키 신을 궁중에 모신 사람이 바로 왕의 어머니가 된 다카노노 니가사라는 것이다. 히라노신사는 간무가 교토로 천도하면서 어머니가 모시던 이마키 신을 새 도읍지로 옮겨온 것이다.
신사의 네 번째 신인 히메는 나중에 히라노신사가 왕실수호신으로 격이 높아질 때 다카노노의 모계 쪽 씨신을 모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고 한다.
그러면 중간의 구도와 후루아키 신은 누구인가. 일본 근대의 저명한 동양학자인 나이토고난(1866~1934)은 구도를 백제 구수(?~384, 재위 375~384)왕으로, 후루아키를 백제 비류(?~18)왕과 초고(?~375, 재위 346~375)왕에 비정했다. 신사에서는 이설(異說)로 치지만, 에도시대 국학자 반 노부토모(1773~1846)는 성왕(?~554, 재위 523~554)으로 본 것 같다. 누가 돼도 다 ‘백제왕’이다.
그런데 왕인 구도가 세월이 흘러 민중 사이에서 ‘부엌의 신’이 된 것이 재미있다. 한마디로 ‘굴뚝 신’이기 때문이다. 구도 신은 가마도 신이라고도 하는데 ‘가마도’는 한자로 조(竈), 즉 부엌이다. 우리말 ‘가마’와 같고, 우리 민속에서 부엌에 조왕신을 모시는 것과 비슷하다. 부엌은 불을 붙이는 가마와 연기를 뽑아내는 굴뚝으로 돼 있다. ‘구도’는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어가 대개 그렇듯이 ‘굴뚝’에서 받침이 탈락한 것이다. 중세기에 닌도쿠라는 왕이 민가의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세금을 면해주자 백성들이 그를 히라노 신으로 모셨다는 전설이 있다는데, 이 역시 ‘구도=굴뚝’ 설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일화가 아닐까.
신전 옆에 세워둔 참배방법 안내문. 먼저 두 번 절하고 다음에 두 번 손뼉 치고 한 번 절한다.
교토 서쪽 외곽 지역은 오하라(백제계), 오에(다카노노 니가사의 모계 씨족) 등의 성씨에서 나온 지명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오에산 기슭에 다카노노 니가사의 무덤이 있다. 그녀가 죽은 뒤 아들 간무가 바친 붕전(추존문)이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다.
“황태후, 성은 화(和. 야마토)씨, 휘는 신립이다. (…) 조상은 백제무령왕의 아들 순타 태자에서 나왔다. 황후, 용덕숙무하여 일찍이 이름이 높았다. (…) 금상, 위에 오르니 황태 부인이라 높이고, 사거하니 존호를 황태후로 하다. 백제의 먼 조상 도모왕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하여 태어났다. 황후는 그 후예이다.”
간무는 어머니 다카노노(화씨 집안은 니가사가 왕비가 되면서 다카노노 성을 받았다)의 추존문을 빌려 자신이 ‘태양의 아들’ 고구려 동명성왕(주몽)의 계보를 잇는 백제 무령왕의 후예로, 그리고 어머니는 태양의 정기에 감응하여 왕을 낳은 하백의 딸(유화부인)의 ‘화신’임을 선언한 것이다.
오에산 기슭의 다카노노 니가사 왕후 무덤. 교토 천도를 단행한 간무왕의 생모이자 히라노신사의 모태이다.
적자인 이복동생을 제치고 44살에 어렵게 즉위한 간무는 정통성 강화를 위해 ‘왕권신수설’을 내세웠다. 기존의 일본 태양신에 대륙(고구려·백제) 태양신을 더해 자신을 ‘하늘이 내린 왕’으로 포장하고 싶었다. 황태후 추존문은 그런 당시의 정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이 기록은 8세기 일본에도 고구려 난생신화가 전해진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서 무척 흥미롭다.
이처럼 간무와 니가사는 자신들의 혈통, 즉 고구려에서 백제로 이어진 도래계 계보를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간무 집권 뒤 정치는 간무 옹립을 주도한 후지와라 가문과 고구려, 백제 출신의 도래계가 주도했다. 대신 등 고위직을 뜻하는 ‘의정관’ 5명이 고구려와 백제계였던 사례는 이때 말고는 없다고 한다(<교토 속의 조선>).
다카노노 니가사 왕후릉 표지석 ‘고야신립대지릉’.
간무의 교토 천도 역시 간무가 도래계 세력에 의지하려 했던 데서도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교토 이전에 먼저 수도로 삼으려 했던 나가오카쿄 지역(교토의 남서쪽에 위치)과 새 도읍이 된 교토 분지는 모두 신라계 하타씨(연재 제4회 참조), 백제왕씨 등이 많이 모여 살던 도래인의 땅이었다.
오에산 기슭 길가에 무덤 위치를 알리는 ‘환무천황어모어릉참도’라고 한자로 쓴 표지석이 있고 산도를 따라 5분쯤 걸어 올라가면 ‘고야신립대지릉’(高野新笠大枝陵)이 나온다. 능은 마치 후시미모모야마에 있는 아들 간무의 무덤을 규모만 축소해 놓은 듯이 비슷하다. 무덤은 비교적 잘 정비돼 있었다. 찾아오는 이는 거의 없어 보였는데, 1200년도 더 지난 사람이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당분간도 방문객으로는 필자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잠시 묵념으로 천년의 예를 대신했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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