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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 낙산공원 성곽길은 호젓함으로 물든다

한양도성길 낙산·남산·북악산 구간 걷기

등록 : 2016-11-24 14:40 수정 : 2016-11-24 16:22
낙산, 전현주 문화창작자
북악산 구간(숙정문)

창의문~숙정문~말바위안내소~와룡공원~혜화문 (4.7㎞/2시간)

하절기(3~10월) 9:00~16:00 / 동절기(11~2월) 10:00~15:00. 월 휴무

경복궁 뒤쪽에 솟은 북악산(342m)은 신분증 지참이 필수다. 깜빡했다가 되돌아가는 시민들이 제법 있다. 애원해도 봐주지 않는다.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이던 북악 구간이 2007년 전면 개방되며, 창의문이나 말바위안내소 부근 초소에서 방문증을 쓰고 목걸이를 받아야 성곽길로 오를 수 있다.

숙정문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성곽길이 이어진다. 허벅지에 피가 몰리는 기분을 참고, 구름도 머물러 갔다는 ‘청운대’에 닿는다. 청와대 너머 경복궁과 광화문광장까지 내가 선 발끝에서 일직선으로 펼쳐진다. 혜화문에서 오르면 성북동의 고즈넉한 옛 가옥들을 볼 수 있고, 창의문에서 시작하면 1968년 ‘김신조 사건’으로 총탄 자국이 남은 ‘1.21사태 소나무’가 유명한 코스다. 부암동으로 빠지면 자하손만두 등을 거치는 맛집 순례길이, 백사실 계곡으로 돌아서면 계절의 끝을 만끽할 수 있는 계곡길이 열려, 고송 빼곡한 도심 산의 매력을 한껏 보여준다.

땀을 식히던 한 답사객은 “무엇보다 애국심에 불타오르는 시간이었다고 봐야죠. 청운대에서 청와대 보셨죠? 거기서 사람들 외침 혹시 들으셨어요? 하하. 높은 곳에서 아름다운 서울을 바라보니까 뭉클했어요. 후세대를 위한 책임감과 말로 표현 못할 그런 것들, 그런 마음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정말 많은 생각을 했던 길이었습니다”라며 꾹꾹 누른 소회를 전했다. 북악산 자락은 다시 인왕산으로 닿고, 길은 돌고 돈다.

낙산 구간(흥인지문)


혜화문~낙산(낙산공원)~흥인지문(동대문)~광희문(3.3㎞ / 1시간 30분)

“하루에 다 걸을 수 있나요?” 독일에서 왔다는 마이크 슈바이처(47)씨가 내게 물었다. 흥인지문 공원에 있는 ‘한양도성박물관’에서 만났다. 전시관 속 서울과 도성 모형을 보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사업차 출장 왔다가 이틀 시간 내어 서울 구경에 나섰거든요. 동대문 보고 신기해서 걸어왔다가 여기까지 성곽길이 이어져 들어왔어요. 정말 인상적이네요.” 마침 기획전시실에서 ‘푸른 눈에 비친 한양도성’ 특별전을 열고 있었다. 1886년 퍼시퍼 로웰이 쓴 ‘조선, 조용한 아침의 나라’ 기행문이 전시관에 소개됐다. 한양도성의 의미와 8개의 문을 두고 ‘웅장한 건축물이라 감탄했다’는 기록이었다.

마이크 슈바이처 씨가 말을 이었다. “저는 뮌헨 출신인데, 거긴 이런 형태의 조형물이 없으니까요. 동대문과 한양도성은 친절한 서울 사람들과 닮았어요.”

혜화문에서 출발해 동대문을 거쳐 광희문으로 이어지는 ‘낙산 구간’은 언덕이 완만하다. 걷기가 편해서 대부분 목적 없이 나왔다가 동대문까지 이른다. 해 질 녘 엘이디(LED) 조명이 밝히는 ‘낙산 구간 성벽 야경’은 서울 10대 야경 중 하나로 꼽힌다. 성곽길 줄기마다 장수마을, 이화동 벽화마을, 창신동 봉제마을 등의 성곽마을이 포도송이처럼 달렸다.

밝은 달이 오르면 호젓한 마을 정취가 살아난다. 새로 이사 온 젊은이들도 작은 공방과 카페로 골목을 꾸몄다. 때문에 서울을 탐방하는 친구나 커플 여행객,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인기다.

홍콩에서 온 스물두 살 동갑내기 친구 퍼시와 카이윈도 마찬가지였다. “이화동 벽화마을에 왔다가 길 따라 왔어요. 쇼핑·먹거리만 기대했는데, 서울에 이런 평화롭고 귀여운 길이 있을 줄 몰랐어요” 하며 성곽 앞에서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올라온 동네 주민 이소연(48)씨도 창신동을 바라보며 머물고 있었다. “친구와 지나가다가 한 시간째 걷고 있어요. 혜화동에 사는데, 성곽길을 정비하고 복원 중인 모습이 보기 좋아요.” 일제강점기 시절 전찻길을 낸다고, 동대문 양옆의 성벽을 부순 흔적이 있다. 상처가 길이 되어 버스와 화물차, 상인들과 사람들이 뒤섞여 오간다.

남산 구간(숭례문)

광희문~목멱산(남산타워)~숭례문(5.2㎞/3시간 30분)

국보 1호인 숭례문은 예부터 지방 사람들이 서울로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만나는 문이기도 했다. 현판 글씨에 압도되어 주눅 드는 한편, 서울을 실감하고 뿌듯해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지난 2008년 문루 2층이 불에 타 무너지던 모습을 침통하게 바라봤던 시민들이 여전히 이 주위에서 성곽 답사를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경기도에서 온 황미(52)씨 가족은 4인이 오붓하게 해설사와 걷고 있었다. 광희문에서 시작해 남산을 넘어 숭례문을 향하며 ‘한양도성 스탬프 투어’를 시작한 참이었다. “아이들에게 좋은 체험이 될 것 같아 서울시 한양도성 누리집에서 ‘해설사’ 신청을 했어요. 이른 아침에 시작해 4시간째 걷고 있는데, 아이들이 더 좋아하네요.” 정말일까? 둘째 딸 김나연(11)양에게 힘들지 않으냐 물었다. “하나도 안 힘들어요. 새로운 걸 많이 보니까 재밌었어요. 겨울방학 안에 한양도성길 다 걷고, 배지도 받을 거예요.”

반나절 동안 가족과 동행한 문화해설사 신성덕씨는 “강단에서 은퇴한 뒤 10년째 서울시 문화해설사로 일하고 있어요. 한양도성길은 4년째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계절에 서울을 걷는 게 얼마나 좋습니까?” 하며 아이의 말에 뿌듯해했다.

한양도성도감의 심말숙 과장은 “남산 구간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남산타워 부근은 태조가 처음 성곽을 쌓을 때 쓴 돌이 많이 남아 있거든요. 비가 내리는 날은 유독 아름답습니다” 했다.

숭례문 초소에 마련된 스탬프 찍는 장소, 전현주 문화창작자
남산타워와 남소문터 사이를 지날 때는 번잡한 안쪽 길을 벗어나 사람 없는 바깥쪽 성곽길에 도전하자. 안개 낀 듯 아련한 숲의 정경이 성곽 따라 푸르게 펼쳐진다. 17세기 성벽 공사를 담당했던 도공이 자신의 이름과 작업량을 하얀 돌 하나에 새겼다. 가만히 앉아 마주하면, 숨은 길의 매력이 몸에 스며든다.

글·사진 전현주 문화창작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