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 엄마의 베를린살이

"저요, 저!" 손들게 한 트럼프 수업

등록 : 2016-12-01 16:06
독일의 고등 교육과정에서 토론은 빼놓을 수 없는 수업의 일부다. 이재인 제공

수요일 늦은 오후,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불붙어 버린 아이들의 열띤 토론에는 그날 스페인어 시간의 흥분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그날은 중요한 스페인어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지금까지 3년을 배웠지만 통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과목이다. 성적이 형편없는데도 시험공부조차 하기 싫은 과목, 스페인어는 17살 우리 쌍둥이들에게 그런 과목이다.

이렇듯 하품 나던 스페인어 시간이 그날은 달랐다고 했다. 수업 전 모두들 조용히 단어장을 뒤적이고 있는데, 법석을 떨며 등장한 한 아이가 있었다.

“너희들 알아? 트럼프가 대통령 됐대. 미국 사람들 다 미친 거 아냐?”

이렇게 시작된 토론은 선생님께서 오실 때까지 커져만 갔던 모양이다.

“토미 말이 맞아. 미친 거야. 이거야말로 미국판 브렉시트지.”

“야 닐스! 그래도 전 국민이 미쳤다는 건 좀 심하잖아.”


“트럼프가 메르켈에 대해서 어떻게 말했는지 알기나 해? 이민자에 대해선 또 어떻고? 그러는 트럼프의 할아버지도 독일인 이민자였다며?”

당연히 처음에는 선생님도 토론의 열기를 잠시 누그러뜨려보려고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자 가만히 기다리시던 선생님께서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하셨다고 한다.

“너희들 그렇게 할 말이 많아? 좋아. 그러면 실컷 해봐. 단 독일어는 사용 금지야!” 하시면서 칠판으로 돌아선 선생님께서는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셨다.

1. 트럼프 현상은 더 큰 변화의 전초전일까? 2.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가? 3. 트럼프의 당선이 시사하는 정치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토론의 주제는 이 세 가지야. 스페인어로는 어떤 질문을 해도 좋아. 자기의 생각을 알아듣게 발표한 모든 사람에게 1점(최고점)을 주겠어.”

기적은 그다음부터라고 했다. 평소와는 달리 아이들이 그야말로 미친 듯이 손을 드는 바람에 우리 아이들도 열심히 사전을 뒤적여가며 토론에 참여했고, 결국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학생이 1점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아이들은 집에 와서까지도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막내는 트럼프를 당선시킨 미국인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주장인 반면, 첫째는 트럼프가 어마어마한 자산가인 점을 들며 대통령의 정치적 소신을 밀어붙이기에 힐러리보다 수월할 것이라는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 자 신문에 비친 그 주간 다른 학교들의 모습도 마치 같은 연극인 양 흡사하다. 선생님들은 인터뷰를 통해 학생들의 자발적인 토론을 멈출 수 없었던 상황을 묘사하며 학생들이 “쇼크에 빠진 듯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잇달아 다수의 상식은 무너지고 기계들의 예언이 적중하는 게임 속 세상처럼 변해가는 오늘날의 정치 현실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꿈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재인 제독 프리랜서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