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진 성동구 지속발전도시과 주무관이 6월8일 성동구청 사무실에서 스크린리더 프로그램을 사용하며 업
무를 보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희귀성 질환으로 23살 때 시력 상실
소리로 공부해 2년 만에 공시 합격
6개월 수습 동안 도움 준 팀원에게
상장 수여, 색종이 왕관·일기 선물
“보답의 마음·존경의 뜻 담았어요”
지난 4월 성동구 스마트포용도시국 부서원들은 특별한 상장과 깜짝 선물을 받았다. 어용경 국장이 받은 ‘새우깡상’에는 “‘손이 가요 손이 가’ 새우깡 로고송처럼 주옥같은 말씀으로 자꾸만 찾고 싶고, 시보 동안 출근이 기대되게 만들어 주셨기에 이 상을 드려 칭찬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 상장은 성동구청에서 6개월 시보 기간을 마친 새내기 공무원 이승진(26) 주무관이 정성스레 준비한 것이다. 색종이로 만든 왕관, 일기도 선물로 곁들였다.
새우깡상 외에도 ‘맥가이버상’ ‘마더 테레사상’ ‘자비스상’ 등 선배 공무원들의 특징이나 평소 인상적인 점을 재치 있게 상장명으로 만들었다. 지난 6월8일 성동구청에서 만난 이 주무관에게 관행처럼 떡이나 쿠키를 돌리지 않고 상장을 수여한 이유를 물었다. 그는 “시보를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도와준 점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오래 남을 수 있는 뭔가 특별한 것을 해드리고 싶었다”며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선물을 받고 선배들이 기뻐하고 눈가가 촉촉해지기까지 했다는 말을 듣고 제 마음도 따뜻해졌다”며 “새끼 새가 단단한 알을 깨고 나오도록 어미 새가 도와주듯 제가 제 몫을 할 수 있게 업무를 가르쳐줘 너무 고맙다”고 그는 말했다. 부서원들은 케이크, 풍선, 고깔모자 등을 준비해 시보 해제 기념 깜짝 파티를 그에게 열어줬다.
그는 망막색소 변성증이라는 희귀성 질환으로 23살에 시력을 잃은 중도 시각장애인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야맹증, 시야가 좁아지는 증상 등이 나타났고 점점 진행되면서 시력을 잃었다. 소리로 공부해 2년 만인 2021년 서울시 지방공무원 임용시험 장애인 구분 모집에 합격하고 지난해 11월 성동구 신규 공무원으로 임용됐다.
사실 공무원 시험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그는 시각을 잃고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절망했다.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지역에서 대학까지 마친 뒤 장애인복지관 취업 문을 두드려봤지만 실패했다. 삶의 의욕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그가 삶터를 서울로 옮긴 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가족과 친족, 주위 사람들 도움 덕분에 마음을 다시 다잡고 공무원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면서 성격도 달라졌다. 그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지 않는 직업으로 공무원을 선택했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나 복지 제도가 좋은 서울로 지원했다”고 말했다.
이승진 주무관이 부서원들에게 준 상장들. 성동구 제공
최종 합격 뒤 임용등록 자치구 지망 항목에 그는 1순위로 성동구를 썼다. 성동구가 장애인 직원이 근무를 잘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대표적인 자치구라는 평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체적으로 불리한 조건의 시각장애인이 공직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든 건 현실이기에 꼭 성동구에 오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 성동구는 시각장애인 업무를 지원하는 근로지원인 제도를 2016년 서울 자치구 가운데 가장 먼저 도입해 운영해왔다. 안내견에게 명예공무원증도 부여하고 시각장애인의 업무를 돕기 위해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직무교육도 한다. 현재 성동구에는 5명의 시각장애인이 일하고 있다.
첫 출근 때 마음 한편에는 ‘과연 비장애인과 어울리며 일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많았지만, 기우였다. 부서원들은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갈 수 있게 관심을 기울여줬다. 행정 시스템에 결재를 올리는 순서나 단어들을 세심하게 알려주기도 하고 문서 배부 때 실수해 속상해하면 위로해주고 개선 방안에 대한 팁도 줬다.
그는 현재 지속발전도시과에서 지속가능발전 지방정부협의회 운영과 상가 임대차 상담소 신청 업무를 맡고 있다. 스크린 리더 프로그램을 통해 업무 대부분을 처리한다. 가끔 판독이나 확인이 필요할 때는 옆자리에 앉은 근로지원인의 도움을 받는다.
정규 공무원이 된 그는 부서에 도움이 되려고 더 긴장하고 더 많이 노력한다. 그는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우자’라는 자세로 업무에 임하고 있다”고 했다. 일상생활에서 유도와 호신술을 배우고 사이클은 전국장애인 체전 도전을 목표로 연습하고 있다. “목표를 이루고 나니 자신감도 생기고 자기 계발도 더 열심히 하게 됐다”며 “그동안 책을 거의 읽지 않았는데 선배, 동료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2주에 한 권씩 오디오북을 듣고 있다”고 했다.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시각을 차츰 잃어가며 공무원 목표를 세워 이뤄내기까지 구체적인 정보를 얻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다. 합격 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떻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는지 알려주고 싶어 유튜브 채널 5곳에 출연했다. 청년 임대주택 입주 과정을 알린 영상은 조회 수가 50만을 넘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지난 21일 이 주무관은 성동구 상반기 신인 인재상을 받았다. 그는 조직에서 인정받은 것에 무척 기뻐하며 새로운 꿈을 가슴에 품었다. 지방에서도 성동구 성수동이 핫한 인스타 성지로 알려져, 자신이 성동을 알아가는 과정을 되짚으며 홍보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는 “지자체 ‘홍보의 신’으로 널리 알려진 충주시 홍보실 주무관처럼 성동의 홍보맨이 되고 싶다”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현숙 선임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