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과 백남준의 만남’ 이상향을 꿈꾸며 오늘을 달래다

전시오아시스

등록 : 2016-12-08 11:17
백남준의 ‘달에 사는 토끼’와 장승업의 ‘오동폐월’. 서울디자인재단 제공

어린 시절, 겨울이 오면 어머니는 창에 병풍을 둘렀다. 외풍을 막으려고 두른 병풍 아래 누우면 병풍 속 산수화의 쪽배를 탈 수 있었고 산을 오를 수도 있었다. 산수화 속으로 떠나는 여행은 재미가 쏠쏠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고 있는 <간송과 백남준의 만남> 전시를 보다가 문득 떠오른 추억이다.

세기의 예술가 백남준과 간송미술관의 옛 컬렉션은 사실 제목만으로도 벅찼다. 봄가을 간송미술관이 대문을 열 때면 긴 줄을 서서 관람했지만 그저 귀한 옛 그림이구나 싶었고, 백남준의 ‘텔레비전들’은 첨단이면서 철학적이라서 더 어려웠다. 그런데 두 작품을 함께 진열한 전시는 흥미로웠다.

전시장 어귀에서 만나는, 서른 대의 티브이를 주렁주렁 매단 ‘비디오 샹들리에 1번’과 장승업의 ‘기명절지도’는 복을 기원한다. 서양에서 샹들리에는 부귀의 상징이고, 장승업 그림의 감, 게, 수선화, 물고기, 연꽃 등도 기복의 소재다. 백남준의 ‘달에 사는 토끼’의 토끼는 티브이 속의 달을 보고 있고, 짝지어 놓은 장승업의 ‘오동폐월’에는 오동나무 위로 운치 있는 보름달이 은근히 떠 있다. 달에 산다는 토끼가 탈출해 달을 보고 있는 모습이 위트 있다. 서양에서 달은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우리에게 달은 이상향이다.

백남준의 ‘코끼리 마차’는 심사정의 ‘촉잔도권’과 짝을 이룬다. 심사정의 절필 작으로, 간송 선생이 당시 기와집 다섯 채 값 5000원을 치르고 사서 6000원을 주고 동경에서 수리한 귀한 작품이다. 촉나라 촉(蜀), 구름다리 잔(棧), 촉으로 가는 험난한 여정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은 무려 8m가 넘는다. 옆으로 걸으며 그림을 보다 보면 고약한 산세에 마음이 출렁거린다.

이번 전시의 산수화는 모두 이상산수화다. 진경산수화와 대비된다. 폭포수 하염없이 떨어지고, 흑두루미 노닐고, 은자는 정자를 거닐고, 친구를 불러 누각에서 술잔을 나눈다. 그림 한구석 술심부름하는 동자가 있으니 걱정이 없겠다. 부럽다. 한참 서서 그림 속 은자들의 생활을 구경하다 보니, 은퇴하고 자연에 묻혀 살고픈 꿈은 예나 지금이나 생활인의 바람이었구나 싶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풍경도, 사람도, 사물도 모두 이상향을 주제로 한다. 우리 그림을 오래 공부한 간송미술관 학예사는 옛 그림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고 한다. 잠시 그림 앞에 서서 계곡을 거닐고 정자에 걸터앉아본 필자의 소감도 비슷하다. 할리우드 영화의 영웅이 말도 안 되게 악과 싸워 이길 때의 쾌감으로 비유해야 할까.

언젠가 뜻대로 되리라는 낙천성, 현실에서 도망가지 않고 훗날을 기원하며 오늘을 달래는 것. 본래 우리에게 낙천적 유전자가 있었건만 요즘은 참 여유가 없다. 옛 그림 앞에 서서 은자를 찾아보라. 짧은 유람에도 퍽퍽함이 잠시 가신다. <간송과 백남준의 만남> 2017년 2월5일까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자인박물관.


글 이나래 생활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