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부 시가현 오쓰시에 있는 미이데라 절의 신라젠신도(신라선신당). 9세기에 신라묘진(신라명신)을 모시기 위해 처음 지어졌고, 1347년 무로마치 막부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미나모토노 신라사부로요시미쓰를 ‘조상’으로 기리기 위해 재건했다. 건물과 안에 안치된 신라명신좌상은 일본 국보이다.
일본 18개 귀족 가문의 조상 ‘요시미쓰’
정식 이름에는 ‘신라’가 들어가 있어
오쓰시 미이데라 절 신라선신당에서
성인식을 거행한 기념으로 이름 받아
후손은 일본 최초 가마쿠라 막부 세워
오쓰시는 백제 멸망 뒤 한때 일본 수도
고대부터 신라·백제 도래계 모여 살아
비공개 사당 안엔 소주와 사케 “나란히”
일제의 2차대전 패망 뒤 없어진 일본의 구 화족(귀족계급) 가운데 최소 18개 가문이 한 사람을 조상으로 하고 있다.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 1045~1127)라는 헤이안시대의 무장이다. 미나모토 가문은 일본 동북지방의 무사 집안으로, 이 가문의 요리토모(1147~1199)가 일본 최초의 사무라이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1192~1333)를 세웠고, 두 번째 무로마치 막부(1336~1573)의 아시카가(足利) 집안도 미나모토 가문의 일원을 자처했다. 일개 지방 무사에서 일본 사무라이계급의 ‘원조’처럼 된 전통의 무가(武家)이다.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는 이 가문의 3대째 인물로 정식이름은 미나모토노 신라사부로요시미쓰(源新羅三郞義光)이다. 이름에 ‘신라’가 들어간 이 사무라이의 무덤이 교토시 동쪽 오쓰(大津)시의 큰절 미이데라(三井寺) 근처에 있다. 미이데라에는 신라명신상을 안치한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 숲속에 서 있는데 요시미쓰의 무덤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교토의 신라신사를 답사 중인 필자의 발길이 오쓰에까지 닿은 것은 신라선신당의 존재뿐 아니라 신라사부로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도 작용했다. 신라사부로는 사후에 신라명신이 되어 쇼군을 배출한 미나모토(源) 가문의 여러 신사에 모셔지고 있다. 교토에서 비와코 호수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오쓰는 일본 10대 고도의 하나로 꼽힐 만큼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다. 고대 신라, 가야, 백제계가 함께 섞여 살아온 도래인의 고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7세기의 오쓰는 백제-일본연합군이 백촌강전투에서 신라-당연합군에 패하여 백제가 멸망한 뒤(663),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 당시 친백제계 조정이 세운 일종의 ‘전시 수도’였다(667). 그런데 672년 친신라계가 일으킨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면서 오쓰는 폐도가 됐고, 현재는 오쓰쿄(大津京)라는 지명으로 그 자취가 남아 있다.
미이데라 절의 관음당에서 바라다본 비와코 호수. 높은 망루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이다. 미이데라는 원래 이름이 온조지(園城寺)인데, 園城의 훈독 ‘소노키’는 신라의 성이란 뜻이라고 한다.
미이데라는 가서 보면 절이 아니라 성채였음을 알 수 있다. 절 경내에서 바라다보는 비와코 풍경도 높은 성루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이다. 미이데라는 본래 백제계 씨족의 신사였다가 정권이 바뀐 뒤 ‘신라계’ 절(686)이 됐다. 859년 천태종 고승 엔친이 쇠락한 절을 다시 일으키고 선배 엔닌처럼 당나라 신라방(적산법화원)의 신라신을 모셔다 신라선신당을 지었다(연재 10회 참조). 이후 미이데라의 신라명신은 교토 지방 천태종 계열의 많은 절과 신사의 수호신이 되었는데, 신라사부로에 이르러 미나모토 가문의 수호신까지 된 것이다. 미나모토 가문 계열의 신라신사는 모두 이 신라선신당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내세운다고 한다.
신라사부로의 무덤은 절에서 나와 오쓰시역사박물관 뒤쪽 숲길(동해자연보도)을 따라 10여분간 걸으면 나온다(무덤에서 10분쯤 더 가면 신라선신당이다). 묘역은 석조 도리이와 참배도, 석등, 석담 등의 형식이 제대로 갖춰져 있고, 둥근 봉분을 한 무덤에는 특이하게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무덤 양쪽에 ‘신라공묘비’와 오쓰시교육위원회가 설치한 안내판이 서 있는데, 비문을 보니, “신라원공(新羅源公)의 후예”로서 귀족 작위를 받은 18개 가문이 합동해서 1879년 무덤을 새로 단장하고 후손의 번창을 기원하며 봉분에 화수(花樹)를 심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요시미쓰는 후손에게 ‘신라공’이라고 불리며 자랑스럽게 기억됐음을 짐작게 한다.
일본 사무라이계급의 ‘원조’로 추앙되는 미나모토노 신라사부로요시미쓰의 무덤. 미이데라 절과 신라선신당 중간쯤의 산속에 있다. ‘신라사부로’라는 이름은 요시미쓰가 신라선신당의 신라명신 앞에서 성인식을 치르고 받은 이름이다. 현재의 무덤은 1879년 재정비된 것이다.
1987년 설치된 안내판에는, “신라사부로는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로,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賴義)의 아들이다. 형으로 요시이에, 요시쓰나가 있다. 신라사부로는 신라명신을 모신 신라선신당 신전에 원복(성인식)하고 그것을 기념하여 받은 이름이다. 형들도 모두 자신이 원복한 신의 이름을 받아 요시이에는 하치만타로(八幡太郞), 요시쓰나는 가모지로(賀茂二郞)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쓰여 있다. 한편 신라선신당 앞 일본문화청이 세운 안내문은 “요시미쓰가 신라명신의 사전에 원복하고 신라사부로가 되었기 때문에, 미이데라 절은 가와치겐지(河內源氏) 일문을 비롯해 가와치겐지의 계보를 이은 아시카가(무로마치 막부 쇼군) 가문의 존숭을 받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상을 요약하면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는 가와치겐지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신라선신당에서 성인식을 치르고 ‘신라사부로’라는 이름을 받았고, 역대 막부의 조상으로 높임을 받았으며, 그 자손이 최소 18개 이상의 여러 성씨로 나뉘어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16세기 전국시대의 유명한 무장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집안도 신라사부로의 후손이다.
그런데 필자의 관심을 특히 끈 것은 이 미나모토가의 출중한 삼 형제가 성인식을 치른 신사들이었다. 요시미쓰의 신라선신당뿐 아니라, 두 형이 받은 하치만과 가모 역시 신라계 신의 이름으로, 하치만은 신라계 대호족 하타씨의 일파로 여겨지는 신이고, 가모는 하타씨와 동맹을 맺고 교토 지역을 다스린 도래계 호족(연재 2회 참조)이다.
신라사부로 무덤 옆의 ‘신라공묘비’(新羅公墓碑). 신라사부로 후손으로 귀족이 된 18개 가문이 묘역을 정비하고 가문 번창을 소원하며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는 등 ‘신라공’을 기린 내용을 담고 있다.
적자 삼 형제를 모두 ‘신라계’ 신사에서 성인식을 치르고 이름을 붙여준 아버지 요리요시의 의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미나모토 가문은 뿌리가 도래계, 특히 신라계가 아니었을까? 통일전쟁 수행 뒤 별로 할 일이 없어진 어느 화랑의 후예가 일본으로 건너와 가문을 이룬 것이 아닐까?
미나모토 집안의 본거지, 즉 본관 가와치는 지금의 오사카 지역에 속하는 가와치(河內)국 이시카와(石川)군 일대로, 예부터 도래계 씨족이 많이 모여 산 고장이라고 한다. 오쓰 지역도 본래 신라계의 고장이었다가 5세기 후반 가와치 일대에서 백제계가 대거 이주해와 함께 살게 된 곳이다.
그래서 미이데라 절도 신라계와 백제계 양쪽 모두와 역사적 인연이 있다. 교토 천태종의 개조인 사이초, 그 제자로 세키잔선원을 세운 엔닌 그리고 미이데라를 재건한 엔친 등이 모두 이 지역 출신의 도래계라는 설도 존재한다. 미이데라의 본래 이름은 온조지(園城寺)이다. 이 ‘園城’(원성)의 훈독은 ‘소노키’인데, ‘신라의 성’이란 뜻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미이데라가 신라명신을 모신 데는 이 절의 배후에 신라계 도래씨족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미이데라에서 성인식을 치른 미나모토 가문 역시 그 ‘배후’의 일원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문다.
신라선신당 본전 오른쪽에 있는 작은 신당. 신라사부로의 신전인지, 누군가가 소주와 니혼슈(일본주)를 나란히 가져다 놓았다.
깊은 숲속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신라선신당은 건물뿐 아니라 신사 안에 안치돼 있다는 신라명신상도 국보로 지정된 탓인지 일반 관람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쉬움에 신사 주변을 돌던 중 울타리 격자무늬 창살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본전 오른쪽에 작은 사당이 하나 있다. 어쩌면 저것이 신라사부로를 모신 신전이 아닐까 싶어 살펴보는데, 파란 병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영락없는 소주병이다. 자세히 보니 술병이 4개다. 소주병과 사케 두 병, 그리고 막걸리로 짐작되는 병이 나란히 있다. 누군가 신라선신당과 신라사부로의 내력을 아는 이가 신라사부로에게 올린 것이리라.
언젠가 다시 이곳을 찾을 기회가 있으면 그때는 꼭 소주와 사케 한 병씩을 준비해 와서 음복해보리라 생각하니, 오쓰쿄역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