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 문학기행
별처럼 빛나는 골목길 불빛
성북동에 남아 있는 김광섭 시인의 흔적
등록 : 2016-12-08 16:44
비둘기공원의 김광섭 시인 시
시인이 살던 집은 성북동 골짜기로 들어가는 길 우측 언덕바지에 있었다. 시인의 집터에 들어선 빌라 앞에서 보면 맞은편 산과 산비탈에 지어진 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북동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다는 주민에게 옛 얘기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지금 차가 다니는 도로는 개천이 흘렀고 개천 옆으로 좁은 길이 있었다고 한다. 개천을 건너 산비탈에 있는 집으로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광섭 시인이 이곳에 살 때도 그런 풍경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성북동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복개하지 않은 옛 하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국기록연구소에서 2014년 발행한 <김광섭 자서전, 나의 이력서-시와 인생에 대하여> 155쪽에 ‘1965년 6월22일에 앰뷸런스와 들것에 실려 내 집 안방에 눕게 됐다’고 나온다. 또 같은 책 158쪽에 ‘1965년 10월31일 저녁, 나를 낳아 길러주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셨다’고 적혀 있다. 이 일들이 김광섭 시인이 성북동 집에서 살 때 일어났다. 그래서였을까? 김광섭 시인은 성북동 집에 대한 애착이 식어 동소문으로, 다시 미아리로 집을 옮겼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회고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성북동 비둘기’는 성북동 집에서 구상해서 미아리 집에서 완성했다고 한다. 1905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김광섭은 1938년 첫 시집 <동경>을 세상에 선보인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살이하기도 그리고 1941년 경성 중동학교 영어교사로 있을 때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44년까지 옥살이를 해야 했다. <김광섭 자서전, 나의 이력서-시와 인생에 대하여>에 당시의 예심종결서 내용이 나온다. 그중 한 부분이 ‘조선어 과목 폐지는 조선어의 말살을 목표로 한 정책이므로 조선 민족이 존속하는 한 조선어의 절멸을 할 수 없도록 강조 선동하다’였다. 김광섭 시인은 광복 이후 1948년부터 1951년까지 이승만 대통령 공보비서관을 지냈다. 시인으로서 흔히 가질 수 없는 독특한 이력이다. 그 기간 중에 두 번째 시집 <마음>을 발간하기도 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펜클럽, 한국문인협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시 창작에 전념한다. ‘성북동 비둘기’ ‘저녁에’ 등 그의 대표작들을 1965년 병을 얻은 뒤에 병과 싸우면서 완성한 것으로 볼 때, 시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겠다. 심우장 가는 길에 비둘기공원 김광섭 시인이 살았던 집터에서 나와 왔던 길로 돌아나간다. 내리막길을 다 내려가서 큰 도로를 만나면 우회전한다. 만해 한용운이 살았던 심우장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서 심우장을 지나 골목길로 올라가면 비둘기공원이 나온다. 비둘기공원은 ‘성북동 가로쉼터’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작은 공원인데, 김광섭 시인의 시 ‘성북동 비둘기’ 때문에 비둘기공원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공원 벽에 ‘성북동 비둘기’를 새긴 시판을 붙여놓았다. 시판 위에는 비둘기 모양의 조형물을 설치했다. 몇 그루의 나무와 운동기구가 있으며 한쪽에는 책을 진열한 책 보관소가 있다. 국민대학교와 지역주민이 연계해서 진행한 마을 축제 ‘월월축제 2009’의 행사 가운데 하나로 이 공원을 지금의 모습으로 꾸몄다. 공원이 있는 자리가 김광섭 시인과 직접 관련이 있는 곳은 아니지만, 성북동에 살았던 김광섭 시인과 그의 시 ‘성북동 비둘기’가 있었기 때문에 비둘기공원이 지금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비둘기공원에 걸려 있는 시를 읽고 돌아선다. 겨울 해가 짧아 골목길에 어둠이 일찍 내린다. 어두워지는 골목에 저녁밥 짓는 냄새가 흐르고, 창문으로 불빛이 샌다. 불빛이 따듯해 보인다. 돌아가 쉴 수 있는 저 방의 불빛은 누군가에게는 별빛이 아닐까?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별 하나가 나를 내려본다….’ 성북동 골목길을 내려가는데, 노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