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구 분산 위해 ‘지하철 2호선 직선→타원’ 변화

서울을 변화시킨 10대 사건 ⑧ 1970년대 지하철 1호선과 2호선 착공

등록 : 2023-07-27 16:37

서울시 인구 1963년 300만 돌파하며

교통 수요 폭증해 ‘심각한 상황’ 이르러

수요 감당 못한 노면전차 1968년 철거

70년대 지하철 등 대안 교통수단 마련


74년 개통 ‘1호선’은 철저한 수요 논리

가장 사람 많은 남대문로~종로통 관통


77년 착공 ‘2호선’은 인구분산 등 목표

예정에 없던 강남 포함해 투기도 ‘폭발’

해방 이후 서울은 갑작스러운 해방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1945년 90만 명이었던 인구가 1950년 170만 명까지 급속하게 늘어나는 인구 증가를 경험하게 됐다. 이러한 인구 증가는 전쟁으로 한때 주춤했지만 1950년대 중후반 다시 전쟁 전으로 돌아왔고 1963년에는 3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렇게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서울시의 행정구역도 300만 명을 돌파하던 해에 그 이전의 2배보다 훨씬 크게 확장됐다. 하지만 이미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급속히 늘어나는 인구는 걷잡을 수 없었다. 이런 현실은 1966년 일간지에 연재된 이호철의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에서 극명하게 보여줬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1966년부터 1980년까지 하루 평균 894명이 서울로 이주했고, 이들을 위해 하루 224동의 주택과 50인승 버스 18대, 수돗물 268t이 공급돼야 했고, 쓰레기는 매일 1340㎏ 더 증가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서울의 교통문제 또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서울시는 현실 교통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던 노면전차를 1968년 철거했다. 마포에 있었던 노면전차의 종점은 은방울자매의 노래 ‘마포종점’ 속에 추억으로만 남아 있게 됐다.

버스를 증차하는 방법 등으로는 늘어나는 서울 시민의 교통 수요를 감당하기 버거운 상황이 계속됐다. 서울만 만원이 아니라 버스 역시 만원이었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교통수단 도입을 결정했다. 바로 지하철이다. 1호선부터 5호선까지 서울시 지하철 건설에 대한 설계는 1971년 12월 최종 확정됐다.

1974년 개통된 서울 지하철 1호선 내부 모습. 천장 한가운데 일렬로 매달린 선풍기가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당시 지하철 설계의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 우선 서울시의 도로망을 살펴보자. 그즈음 서울의 도로는 도시계획에 따라 종로, 을지로, 퇴계로 등 동서와 통일로, 창경궁로 등 남북으로 설계됐다. 즉 4대문 안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방사선 형태의 도로망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지하철 설계 역시 이런 기존 흐름에 맞게 설계됐다.

지하철 노선 결정의 대원칙은 첫째 이용하는 손님이 얼마나 많으냐, 둘째 승객이 부담하는 요금으로 시설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약 10년 뒤 건설비도 전액 회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하철 노선 결정의 이런 대원칙은 지하철에 들어가는 재원이 워낙 컸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1974년 제일 먼저 개통된 1호선 역시 이러한 것에 가장 충실히 설계됐다. 1호선 노선은 조선 500년 동안 서울의 중심도로였던 남대문로와 종로통을 관통했는데, 이것 또한 오랜 전통도 전통이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가장 많이 다니는 이동 경로였기에 선정됐다.

이런 설계에 근거해 그 뒤 수년간의 공사를 벌인 뒤 1974년 8월15일 마침내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됐다. 그런데 이날 개통식장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가 피살되는 뜻밖의 사건이 발생했다. 정치적 문제야 이 글의 목적이 아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그러나 이날의 사건은 단순히 정치적 문제를 넘어서, 서울시 도시계획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지하철 2호선 1단계 개통 기념 승차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블로그

당시 육영수 여사 피살로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홍성철 내무부 장관이 사임했다. 이뿐만 아니라 지하철 건설을 주도한 서울시장 양택식도 사임하게 됐고, 그 후임으로 구자춘 전 경북지사가 임명됐다. 구자춘 시장은 여러 서울시장 가운데 김현옥(1966~1970년 재임)과 함께 좋든 싫든 현재 서울시의 근본적인 도시구조를 만든 사람이다. 군 출신인 두 사람은 모두 40살을 갓 넘은 나이에 서울시장이 됐다. 둘 다 5·16 쿠데타 세력의 일원이었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은 한마디로 ‘서울을 갈아엎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현옥은 ‘불도저 시장’, 구자춘은 ‘황야의 무법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구자춘 시장은 임명 초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의 소개로 당시 김형만 홍익대 도시계획과 교수 등과 식사 자리를 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김형만 교수는 “현재의 서울 도시계획에는 철학이 없다. 서울의 도시계획이 철학을 가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단핵 도심을 3핵으로 하고 강북 인구와 산업의 합리적인 분산을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은 조선시대로부터 4대문 안의 단핵 도심으로 그 기능을 유지해왔지만 앞으로는 서울의 중심 기능을 3개의 핵으로 분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얘기한 3핵은 강북 도심, 여의도와 영등포로 이어진 영등포 도심, 그리고 영동·잠실 지구를 연결하는 영동 도심이었다. 구자춘 시장은 3핵도시론을 추진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그 결과 1977년 4월 서울을 3개의 핵으로 나누는 ‘3핵 도시구상’을 담은 ‘서울도시기본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의 도시구조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런 3핵 도시를 향해 구 시장이 첫 번째로 펼친 정책이 1977년 착공한 지하철 2호선 건설이었다. 본래 1971년 지하철건설계획도에는 왕십리~을지로~마포~여의도~영등포로 이어지는 동서로 이어진 노선이었지만 구 시장은 이 노선을 방사선에서 순환형으로 100% 바꿨다. 이 결정은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과 협의한 것이 아니라 100% 구자춘 시장의 독단적 결단이었다. 물론 영국과 일본에도 순환선이 있지만 그것은 모두 방사선 전철이 완성된 뒤 착공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구자춘은 그야말로 ‘황야의 무법자’였다.

1968년 사라진 서울 전차의 마포종점이 있었던 마포구 불교방송국 뒤편. 공중화장실을 전차 모양으로 만들어놓았다. 유영호 저자

1975년 5·16 쿠데타 세력 중 행정부에 남아 있던 사람은 김종필 국무총리, 차지철 경호실장과 함께 구자춘 서울시장뿐이었다. 이미 중앙정부의 정책으로 결정된 노선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1970년 한남대교(제3한강교)와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점화된 말죽거리 신화는 지하철 2호선의 노선 변경으로 마치 기름을 부은 듯 더욱 기승을 부렸다. 물론 인구 분산에 지하철 2호선의 노선 변경은 크게 기여했지만, 그가 의도한 3핵 도시가 현실적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별개 문제다. 그런 전문적인 평가는 도시계획전문가의 몫으로 남겨두자.

참고로 서울지하철과 관련한 에피소드 두 개를 이야기하면 첫째로 1호선과 관련해서는 본래 시청역과 종각역을 통과하면서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동아일보 사옥(현 일민미술관)의 지하를 관통하는 원만한 곡선의 노선을 계획했지만 당시 여러 이유로 정부와 사이가 좋지 않던 동아일보의 반대로 거의 90도에 가까운 직각으로 꺾여 지나가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그 부근을 지날 때는 감속해야 했으며, 또 철길 마모를 줄이기 위해 윤활유를 더욱 많이 뿌린다고 한다.

둘째로 1호선은 철도공사가 관할해 기존 철도와 같이 좌측통행을 하지만, 2호선부터는 서울메트로가 관할하면서 우측통행을 한다. 따라서 2호선 홍대역은 우측통행이지만 경의선 홍대역은 좌측통행이다. 이것은 역 이름만 같고 철길이 다르기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4호선의 경우 하나의 철길인데도 좌측통행과 우측통행이 동시에 일어난다. 4호선의 강북 구간에서 남태령역까지는 우측통행으로 열차가 달리다가 남태령역과 선바위역 사이에서 운행 진로를 바꿔 오이도역까지는 좌측통행을 한다. 이렇게 운행 진로가 바뀐 부분은 코레일 관할 구간이다. 이렇게 하나의 노선에서 우측통행과 좌측통행이 바뀐 부분에 대해 일부에서는 자주성이 결여된 것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글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그림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