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따라 동서 배치’ 많았던 서울서
남북으로 줄 선 세운상가 모습 이질적
일제 말기에 건설된 ‘소개공지대’ 영향
‘공습 화재’ 피하려 건설된 공터가 바탕
해방 뒤 빈터에 무허건물·사창가 형성
‘당대 최고의 건축가’ 김수근 설계 맡아
프랑스·영국 최신 건축 개념 반영했지만
서울 모습과 안 맞아 ‘최악 작품’ 평가도
이제 곧 다가올 9월은 지난 2013년 건축가들이 뽑은 대한민국 최악의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지적한 세운상가가 1966년 착공된 달이다. 그리고 그보다 2년 뒤인 1968년 9월은 세운상가 일대에 당시 ‘종삼’으로 불리던 세계 최대의 사창가 철거가 시작된 달이기도 하다. 당시 사창가 철거는 세운상가 건축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1966년 세워지기 시작한 세운상가는 서울의 지형을 놓고 볼 때 이상한 곳이다. 이는 우리가 남산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바라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서울 도심의 경우 청계천이 동서로 흐르고 북쪽으로 북악산과 인왕산이 솟아 있는 지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많은 주택이 동서로 배열된다. 배산임수를 중시하는 우리의 풍수리지상 대부분의 주택이 남향으로 지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지형에 부합하는 자연스러운 도시개발이다.
하지만 세운상가는 달랐다. 도심의 한가운데 1천m가량 남북으로 거대하게 배열됐기 때문이다. 일반적 흐름을 거스르는 참 독특한 구조다. 그래서 1968년 준공됐을 때 일부 건축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인 세운상가에 찬사를 보냈고, 또 다른 많은 건축가는 그야말로 서울 건축사의 ‘옥에 티’라고 지적했다.
그러기에 세운상가가 서울시의 다른 건축물과 안 맞고 볼썽사납다고 주장하는 어느 교수는 그것을 철거하고 긴 공원을 만들어 소통의 공간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세운상가를 철거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대지만 약 5천 평에 건물 연면적은 약 6만2천평이나 되는 곳에 수많은 점포와 사무실, 아파트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현 소유주들에게 보상해야 할 비용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이다. 현재 오세훈 시장이 세운상가를 허물고 그 자리에 녹지공원을 조성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보상 비용 등 마련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업이 큰 진척을 못 내고 있다. 참으로 난감한 건축물임이 분명하다.
세운상가가 골치 아픈 건축물이라는 사실은 세운상가를 설계한 당시 ‘국내 최고의 건축가’인 김수근(1931~1986)조차 세운상가를 자신의 포트폴리오에서 삭제하고 말았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동서로 배치된 서울의 도시건축 흐름과 달리 남북으로 설계된 세운상가.
그렇다면 현재 고민거리로 남은 세운상가를 도대체 왜 건설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와 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출발점은 일제강점기 말기였던 1939년 9월에 일어난 제2차세계대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1차 대전과 달리 항공기의 발달로 인한 공습 피해가 무척 컸다. 이러한 전쟁 양상 변화 탓에 2차 대전 민간인 피해는 1차 대전에 비해 수십 배나 늘었다.
당시 목조건물이 대부분이었던 경성도 공습 피해를 막기 위해 여러 대책을 세웠다. 그중 하나가 ‘소개공지대’의 건설이다. 소개공지대란 ‘전쟁 중 폭격 등으로 발생한 화재가 주변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빈 광장’인데, 1945년 경성에는 모두 19개의 소개공지대가 만들어졌다.
세운상가 터도 그중 하나다. 일제는 1945년 3월 종로에서 필동까지 길이 760m, 폭 50m의 직사각형 형태로 대지를 밀어버리고 이곳에 소개공지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일본 패망 이후, 그러니까 세운상가 터에 소개공지대가 만들어진 지 불과 5개월 뒤인 1945년 8·15 해방 이후 거의 방치된 상태로 놓이게 됐다. 해방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시절 이곳에 일부 도로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당시의 미비한 행정력으로는 이 지역을 종합적으로 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후 1960년대 중반까지 세계 최고의 사창지대 ‘종삼’의 핵심 지역이었던 종묘앞이 지금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이렇게 넓은 빈터가 관리되지 않은 상태로 놓이자 전쟁 이재민과 북에서 내려온 월남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빠르게 도시 슬럼가로 전락했으며, 더 나아가 곳곳에 사창이 들어서 이 일대가 소위 ‘종삼’이라 불리는 한국 최대의 사창가가 되고 말았다. 당시 그 규모는 종로2가에서 5가까지 이르렀으며, 종로의 북쪽 종묘 인근의 한옥 지대는 고급 사창가가 됐다고 한다.
반면에 종로 남쪽의 경우 전쟁 때 파괴된 주택들을 중심으로 무허가건물이 즐비하게 생겨나면서 하급 사창가가 형성됐다. 그리고 그 하급 사창 중에서도 현 세운상가가 들어선 터에는 그야말로 최하급 사창이 밀집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새로 1963년 서울시장에 임명된 김현옥은 이곳에 대한 도시개발을 준비하던 중구청 직원과 함께 1966년 6월에 현재 세운상가가 들어선 지역을 시찰했다. 그런데 당시 현장을 시찰하던 김 시장마저도 이곳에서 윤락녀의 호객행위를 경험했다고 한다. 김 시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크게 느끼고 시찰을 마친 뒤 바로 이곳에 대한 개발 필요성을 청와대에 보고했다. 이곳은 이제 중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로구까지 포함한 서울시 전체 문제로 확대됐다.
박종철 열사가 물고문으로 희생된 남영동 대공분실. 김수근의 설계 중 최악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후 서울시는 사업 인가를 건설부에 제출했지만, 처음에는 졸속이라며 비판받고 반려됐다. 하지만 5·16 쿠데타 세력으로 참여했던 ‘불도저’ 김현옥 시장은 1966년 9월8일 세운상가의 종묘 앞 건물인 아시아상가의 기공식을 거행했다. 당시 중앙도시계획위원회에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은 상태였지만, 김 시장은 그 자리에서 ‘세운상가’(世運商街)라는 휘호를 썼다.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곳에 들어서도록 계획된 대림상가, 진양상가 등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1.8㎞에 이르는 8개 건물군의 이름을 ‘세운상가’라고 통칭하게 된 것이다.
세운상가를 설계한 김수근은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1887~1965)가 1950년대 마르세유에 완성한 집합주택 위니테와 영국의 건축가 부부인 앨리슨 마거릿 스미슨(1928~1993)과 피터 데넘 스미슨(1923~2003)이 주장한 다층도시의 공중가로 개념을 적용해 세운상가를 설계했다.
위니테는 운동과 여가생활을 중시하는 20세기형 인간의 개인 생활을 수용하고, 그들의 사회적 교류를 가능하도록 한다는 개념의 건축물이고, 공중가로는 도시에서 가로가 없어졌기 때문에 단절이 심화됐다고 판단해 공중에 가로를 만들어 건물을 연결하는 개념이다.
일본 신사를 떠올리게 하는 옛 국립부여박물관. 역시 김수근의 작품이다.
이에 따라 세운상가에 대한 설계와 조감도가 나오자 <중앙일보>는 “마치 서울이라는 바다에 뜬 아파트라는 이름의 배처럼 꾸며진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또한 세운상가는 완공 직후 도심 한가운데 위치했을 뿐만 아니라 신축건물이라는 프리미엄 덕분에 상가와 아파트 등이 5~8년간 대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준공 이후 동부이촌동의 한강맨숀으로 소위 맨션 바람이 불면서 세운상가의 아파트 수요가 감소한 점 △당시 신세계·미도파 등이 직영체제로 전환한 점, 그리고 △1979년 중구 소공동에 롯데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명동으로 이동하게 된 점 등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주면서 세운상가는 그야말로 전자제품과 악기전문점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더욱이 그 뒤 용산전자상가가 1987년 개장하면서 세운상가는 그야말로 쇠락한 모습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그림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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