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 문학기행
사색의 길에서 촛불처럼 살다간 작가들을 만나다
한용운 방정환 박인환 최학송 계용묵 등 작가들이 묻힌 ‘문학기행 성지’ 망우리공원
등록 : 2016-12-22 15:16
길 왼쪽에 시인 김상용을 알리는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 ‘왜 사냐 건 웃지요’라는 유명한 구절로 끝을 맺는 시 ‘남으로 창을 내겠오’를 지은 시인이 김상용이다. 김상용 시인의 묘를 알리는 이정표가 없어서 그 일대 묘를 돌아보며 찾아봤는데 결국 못 찾고 돌아서야 했다. (망우리공원 사색의 길에 있는 유명인들의 묘를 알리는 이정표와 안내판을 설치하는 일을 지금 하고 있으니, 설치가 끝나면 일반인들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겠다. 기존에 묘 어귀에 연보비를 세운 묘는 비교적 찾기 쉽다.) ‘사색의 길’은 포장된 도로지만 숲 그늘에서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길을 따라 산책하듯 걷다가 방정환의 묘 어귀에 선다. 묘 어귀에 방정환의 글 ‘어린이날의 약속’ 일부를 발췌해서 새긴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앞 산기슭에 방정환의 묘가 있다. 홍제동 화장터에 있던 유골을 후배인 최신복 등이 모금 운동을 해서 이곳으로 이장했다. 방정환의 묘비에는 ‘童心如仙'(동심여선)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어린이 마음은 천사와 같다는 뜻이다. ‘어린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어린이가 읽을 동화를 지은 사람, 일제강점기 민족의 미래는 어린이에게 있다며 어린이를 위해 살다 간 사람이 방정환이다. ‘삼십 년 사십 년 뒤진 옛사람이 삼십 년 사십 년 앞사람을 잡아끌지 말자. 낡은 사람은 새 사람을 위하고 떠받쳐서만 그들의 뒤를 따라서만 밝은 데로 나아갈 수 있고 새로워질 수 있다.’ 1930년 방정환이 남긴 글이다. 삼거리에서 다시 출발지점까지 그다음에는 한용운의 묘가 나온다.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이다. 그런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안히 산단 말인가’라며 성북동 골짜기 심우장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 만해 한용운도 이곳에 묻혔다. 한용운의 묘는 부인의 묘와 나란히 있다. 묘비에 ‘부인유씨재우’라고 적혔다. 묘비 옆이 한용운의 묘이고 그 옆이 부인의 묘다. 한용운의 묘를 뒤로하고 걷는다. 삼거리가 나오면 우회전해서 걷는다. 출발한 곳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백치 아다다>를 지은 소설가 계용묵의 묘가 길 왼쪽 옆 산비탈 어디에 있다. 표지석이나 이정표가 없으니 분묘번호나 비석의 이름을 확인하며 찾아야 한다. 산비탈을 아래위로 좌우로 오가며 하나하나 확인하며 찾는데, 결국 못 찾았다. <백치 아다다>는 말 못하는 여자 ‘아다다’(장애 때문에 ‘아’와 ‘다’ 같은 발음만 한다고 해서 붙은 별칭)가 겪는 고난을 통해 그 시대의 하층계급 여성이 겪어야 했던 인생을 형상화한 소설이다. 계용묵의 대표작인 <백치 아다다>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초여름 산들바람 고운 볼에 스칠 때…’로 시작하는 노래로도 만들어졌다. ‘사색의 길’로 올라왔다. 날은 저물어가고 마음은 급해진다. 길 오른쪽에 묘로 올라가는 계단 공사를 하고 있다. 그 위에 소설가 최학송의 묘가 있었다. 묘 옆에 있는 안내판에 따르면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난 최학송은 평생 가난했다. 북간도에서 방랑 생활도 했으며 <중외일보> 기자와 <매일신보> 학예부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가난은 늘 그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탈출기> <홍염> 등은 가난했던 그의 인생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시인 박인환의 묘에 들렀다. 길가에 이정표가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시인의 무덤 앞에 선다. 그의 묘 앞에서 그가 지은 시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을 떠올린다. 출발한 곳으로 돌아가는 길에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에 곡을 붙인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가사가 생각나지 않으면 생각나지 않는 대로, 생각나는 구절들은 생각나는 대로 작은 소리로 노래를 하다가, 더 이상 생각나지 않는 가사를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고 멈춘다. 바람이 지나간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