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그림 <풍신뇌신도>. 다이내믹한 동작과 자신의 임무에 도취한 듯한 신나면서 코믹한 표정 묘사가 압권이다. 다와라야 소다쓰의 작품으로, 일본회화사상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왕실막부 후원으로 융성한 교토의 절
장식화 필요한 가옥 구조도 한몫한 듯
비공개 많고, ‘특별전시’는 비싼 게 흠
기온거리 사찰인 겐닌지 ‘가성비’ 으뜸
풍신뇌신도는 역동성과 색채감 압권
운룡도 등 수묵화와 쌍룡도 등도 볼만
가레산스이정원, 종일 봐도 싫증 안 나
시간 내어 주변 절 돌아보기 ‘멋진 경험’
그림 구경을 하러 절에 간다고 하면 의아해할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년고도’ 교토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교토에서는 많은 절이 문화재급의 뛰어난 그림과 조각, 공예품 등을 소장하고 있다. 다이도쿠지(大德寺) 같은 절은 일반 관람이 쉽지 않아서 그렇지, 소장목록으로만 보면 그 자체로 하나의 초일류 미술관이다.
교토의 오래된 유명 사찰이 예술품을 많이 소장한 것은 일본 정치사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교토에는 왕실과 막부의 후원으로 융성한 절이 많은데, 그 세력으로 당대 일류 예술가들의 뛰어난 작품을 많이 모으고 간직할 수 있었다. 사찰은 사교와 정치의 장이기도 했으므로 수많은 위세품과 장식품도 필요했다. 일본 가옥 특성상 다다미방의 벽이나 칸막이에 그림이 그려져서 건축물과 분리되기 어렵다는 점도 사찰이 당대 일류 예술가의 명품을 많이 소장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이 됐던 것 같다.
고이즈미 준사쿠라는 화가가 77살에 그린 천장화 <쌍룡도>. 두 마리 용이 서로 돌며 ‘아우’(阿吁. 소리의 열고 닫음(開合)을 뜻하는 불교용어)를 화창하는 모습을 묘사했다. 옥구슬을 쥔 용이 ‘아’ 소리의 용이다.
그림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쉬운 점은, 다이도쿠지처럼 비공개가 많은데다 공개의 경우도 ‘특별배관’이라고 해서 일정 기간만 전시하고 관람료도 비싸다는 것이다. 공공전시의 어려움과 문화재 보호 측면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전시장 입구까지 갔다가 주머니 사정으로 발길을 돌려야 할 때는 돈 때문에 이성에게 차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무료까지는 아니더라도 언제든 소정의 관람료로 좋은 그림을 구경할 수 있는 절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다녀본 곳 중 가성비가 좋은 ‘착한 절’ 하나를 소개해볼까 한다. 교토의 관광명소 기온(祗園)거리의 겐닌지(建仁寺)다. 국보급을 비롯한 에도시대 걸작에서 현대 수묵화까지 한자리에서 두루 감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만족도가 높아 몇 번 갔는데 다른 분들은 어떨까 궁금하다.
8면짜리 장벽에 두 마리 용을 그린 <운룡도>의 일부. 박력 넘치는 이 그림은 화가가 팔을 휘두르듯이 그렸다고 한다. 가이호 유소 작.
겐닌지는 13세기 초 건립된 교토 최초의 선종사원이다. 이 절을 세운 에이사이(榮西. 1141~1215)는 선불교와 함께 차문화를 교토에 처음 들여온 선사이다. 일본 최초 사무라이 정권인 가마쿠라막부에 선과 차를 소개해, 귀족문화에 콤플렉스가 있던 사무라이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 그래서 겐닌지는 일본인에게 ‘다도의 성지’로도 여겨진다. 겐닌지는 쇼군의 비호 아래 교토에 있는 대규모 절 5곳을 일컫는 ‘교토5산’ 중 제3위로 올라설 만큼 융성했다. 지금의 절도 크지만 메이지유신 전에는 배 이상이었다고 한다.
겐닌지는 전형적인 선종가람 형태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여러 건축물이 역사적으로 유명한데, 필자는 방장 건물이 특히 볼만했다. 1599년 히로시마 사찰의 것을 옮겨온 것이라는데 나무껍질로 된 넓은 지붕과 구리판으로 만든 긴 처마의 기품이 보는 사람을 저절로 머리 숙이게 한다. 흰 모래로 망망대해를, 푸른 이끼와 돌로 피안의 이상향을 묘사한 가레산스이 정원은 하루 종일 바라봐도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다.
방장 건물은 1599년 이전해 올 당시에는 지붕이 구리판이었는데, 건립 800주년(2002년)을 맞아 창건 당시의 나무껍질 지붕으로 돌아갔다. 흰 모래에 푸른 이끼와 돌을 배치한 정원(다이오엔)은 가레산스이의 명작 중 하나이다.
기온시장을 남북으로 지나는 하나미(花見)소로를 따라 골목 구경을 하며 슬슬 걸으면 겐닌지 절 후문이 나온다. 절을 돌아보는 ‘정통 코스’는 반대쪽 칙사문에서 시작해 삼문을 거쳐 법당과 방장을 구경하고 경내의 탑두(말사)들을 차례로 돌아보는 것이다. 그림구경이 먼저이면 500엔 입장료를 내고 방장건물로 곧장 가면 된다.
방장 입구에 들어서면 ‘대재심호’(大哉心乎, 크구나 마음이여!)라는 에이사이선사의 선어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이어서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풍신뇌신도>(風神雷神圖)와 마주한다. 캐논카메라 회사가 교토박물관에 가 있는 진품을 초정밀 디지털 기술로 복제한 것이다.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어서 화질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박물관보다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의 정(庭)’의 도형은 우주의 근원을 상징한다고 한다. 땅(地), 물(水), 불(火)을 나타낸다고도 설명하는데, 천지인(天地人)으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이 <풍신뇌신도>는 두 폭 한 쌍(4폭. 세로 154.5×가로 169.8㎝)의 병풍화이다. 왼쪽에 벼락신(雷神), 오른쪽에 바람신(風神)을 묘사했다. 풍신과 뇌신은 본래 농경의 신인데, ‘신불습합’(神佛習合, 불교와 신토가 융합한 종교 현상)으로 천수관음보살의 수하권속이 된 신들이다. 그림은 풍신과 뇌신을 화폭 양쪽 끝에 배치하고 중간을 여백으로 두면서 마치 두 신이 신통력을 겨루는 듯하게 묘사해 화면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풍신은 바람주머니를 들고 있고, 뇌신은 신나게 북을 치는 모습이다. 본래 붉은색으로 묘사하는 뇌신을 흰색으로, 청색의 풍신을 녹색으로 바꾸고, 금박과 은니, 먹과 안료를 절묘하게 배합해 뛰어난 색채감각을 만들어냈다.
낙관이나 도장이 없지만, 일본 미술학계는 의심의 여지 없이 다와라야 소다쓰(俵屋宗達. 생몰년 미상)의 작품으로 본다. 역동적인 구도와 독창적인 착상, 어느 유파에도 기대지 않은 자유롭고 대담한 특유의 작풍이 그의 다른 작품과 다르지 않다. 에도시대 이래 일본의 유명 화파 중 하나인 고린(光琳)파의 비조로도 여겨지는 다와라야는 부유한 상공업자(마치슈) 출신의 화가이다. 화방을 운영하면서 제자들과 장식화, 수묵화, 민화, 일상용품 그림 등 여러 장르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지만 정작 자신의 개인정보는 거의 남기지 않았다. 화방(다와라야공방)의 실재와 ‘다와라야부채’의 인기, 기록 속의 교유관계 등으로 미뤄 1570년대에서 1640년께 사이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그림은 시기적으로 다와라야 만년의 ‘최후 걸작’이다.
현대에 조성된 정원인 ‘초온테이’(潮音庭). 겐닌지 본방 중정에 자리잡은 4방 정면의 정원이다.
방장의 벽과 칸막이에는 가이호 유쇼(海北友松. 1533~1615)의 유명한 <운룡도>(雲龍圖)가 있다. 용 그림으로는 동양 미술사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명작이다. 이 역시 초정밀 디지털 재현작이다. 가이호는 당시 최대화파인 가노파에서 배운 뒤 중국 수묵화를 받아들여 자신만의 화풍을 창조해 가이호파(海北派)의 비조가 된 화가이다. 겐닌지에서는 <운룡도> 외에도 그의 유명한 수묵화 작품을 여럿 볼 수 있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산수도를 비롯해 <화조도> <죽림칠현도> <금기서화도> 등이 있다. 모두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방장을 나와 법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천장에 그려진 현대 수묵화 <쌍룡도>가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가로 15.7m, 세로 11.4m 크기에, 종이에 먹으로 그린 대형 천장화이다. 일본 현대 수묵화의 빼어난 작품이다. 이런 <쌍룡도>는 주로 선종사찰 법당에 그려지는데, 겐닌지 법당에는 원래 용 그림이 없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절 창건 800주년(2002년)을 맞아 도예가이자 수묵화가인 고이즈미 준사쿠(1924~2012)가 1년10개월에 걸쳐 완성했다고 한다.
겐닌지는 정원도 아름답다. 메이지시대의 정원인 다이오엔(大雄苑)과 비교적 현대에 지어진 ‘○△□의 정(庭)’, 초온테이(潮音庭) 등도 발걸음을 머물게 한다.
겐닌지를 구경하기로 작정했다면 시간을 넉넉히 내어 주변 절까지 돌아보는 일정을 짜보기를 권한다. 근처에 있는 로쿠하라미쓰지(六波羅密寺)는 영락해 지금은 사찰처럼 보이지도 않지만 옛날에는 일본을 호령하던 헤이케(平家) 가문의 원찰이었다. 이곳 ‘보물관’이 소장한 구야(空也. 일본 10세기 승려)상은 일본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가는 길에 “악연을 끊고 좋은 인연을 찾아준다”는 야스이곤피라구(安井金比羅宮) 신사에 잠시 들러 소원을 빌어보는 것도 이방인으로서 걷기의 가성비를 높이는 좋은 생각이다.
글·사진 이인우 리쓰메이칸대학 ‘시라카와 시즈카 기념 동양문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