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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 해방촌 골목상권 회복의 ‘구원투수’ 되다

서울신용보증재단 용산지점, ‘해방촌국제단편영화제’ 개최
해방촌 특색 맞는 문화축제 개발…상인들 “새 출발 계기”

등록 : 2023-09-21 15:10 수정 : 2023-09-21 15:15
재단의 첫 번째 영화제…카페가 상영관 되고, 할인쿠폰도 좋은 반응

40~50명 들어가는 상‘ 영장’ 매일 매진

참사 직후 “추모 우선” 마음 쓴 상인들

자신감 회복…벼룩시장 등 함께 모색

코로나19와 이태원 참사 등으로 위축된 해방촌 상권 활성화를 위해 서울신용보증재단 용산지점이 마련한 ‘해방촌국제단편영화제’가 지난 11일 시작해 22일까지 진행되고 있다. 해방촌상가번영회 회원 등이 지난 13일 해방촌에 있는 카페 ‘그랩어’ 4층에서 영화 상영에 앞서 영화제 푯말 등을 들고 밝게 웃고 있다. 왼쪽부터 권태유 서울신용보증재단 용산지점 팀장, 이진구 와인레스토랑 ‘미암미암’ 대표, 정다정 비건식당 ‘베제투스’ 대표, 박석훈 카페 ‘그랩어’ 공동대표, 김근호 일식집 ‘심야식당기억’ 대표.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이번 ‘해방촌국제단편영화제’를 계기로 해방촌 상권이 새롭게 출발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지난 13일 저녁 8시 용산구 해방촌에 있는 카페 ‘그랩어’ 4층. 카페를 운영하는 박석훈(54) 대표가 30여 명의 시민·상인과 함께 단편영화 <코끼리 뒷다리 더듬기>(감독 김남석)를 보고 나오면서 한 말이다. 시각장애인 우현과 청각장애인 친구 하얀이 카메라를 부수고 달아난 범인을 잡는 배리어프리 영화 <코끼리 뒷다리 더듬기>는 지난 11일부터 22일까지 진행 중인 ‘해방촌국제단편영화제’의 12개 출품작 중 하나다.

‘해방촌국제단편영화제’는 서울신용보증재단(이사장 주철수) 용산지점이 마련한 지역축제다. ‘서울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지원하는’ 서울신용보증재단이 코로나19와 이태원 참사의 영향으로 크게 위축된 해방촌의 골목상권을 되살리기 위해 조직했다. 재단이 주관하는 지역축제를 영화제 형식으로 진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예산도 모두 7천만원으로 작지 않은 규모다. 그만큼 현재 해방촌 지역이 경험하는 골목상권 위축이 예사롭지 않다는 뜻이다.


해방촌국제단편영화제 포스터와 쿠폰. 서울신용보증재단은 쿠폰을 통해 영화제 기간에 결제한 금액에 대해 1만원당 5천원씩 해방촌 골목상권 내에서 쓸 수 있게 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행정구역상으로 용산구 용산2가동 일대를 가리키는 해방촌은 그동안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핫플레이스’로 이름이 높았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피란민촌으로 출발한 해방촌은 인접한 미군부대의 영향으로 ‘영어 강사 등 장기 거주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또한 녹사평대로를 사이에 두고 경리단길과 마주한 해방촌은 한때 ‘제2의 경리단길’로 불릴 정도로 외국인과 내국인이 몰리던 곳이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신선한 콘셉트를 가진 자영업자가 많이 모이던 곳이기도 하다.

박 대표와 함께 이날 영화를 본 ‘그랩어’ 길성연(47) 공동대표, 와인레스토랑 맛집 ‘미암미암’ 이진구(51) 대표, 비건식당 ‘베제투스’ 정다정(34) 대표, 일식집인 ‘심야식당기억’ 김근호(32) 대표 등도 ‘도전정신’을 가지고 해방촌을 찾은 이들이다.

지난 11일 저녁 2023 해방촌국제단편영화제 개막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 영화 상영 전 루프톱에서 식사를 즐기고 있다. 서울신용보증재단 제공

박 대표와 길 대표는 지난해 4층 건물을 완공해 해방촌 상권에 합류했다. 두 사람 다 용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협성대 산업디자인과 교수이기도 한 박 대표는 마포구 상암동 등지에서 공공시설물 관련 디자인 전문회사인 ‘주식회사 다다’를 20년 이상 운영한 전문 기업인이기도 하다. 박 대표와 길 대표는 해방촌에 온 이유에 대해 “용산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용산공원 등의 미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며 “더욱이 해방촌은 옛날 콘텐츠와 현대 콘텐츠 등이 함께 있어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진 곳”이라고 말했다. 현재 1층은 카페 ‘그랩어’로 운영하고, 2~3층은 디자인회사 다다가 사용한다. 4층은 주로 대관을 하는데, 이번 해방촌국제단편영화제 상영 장소로도 활용됐다.

미암미암 이진구 대표는 2019년 이곳에 가게를 열었다. 2016년에 다른 곳에서 가게를 하다가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개성 있는 상권에 반해” 해방촌으로 옮겼다.

비건식당 베제투스의 정다정 대표는 2016년 첫 사업장으로 해방촌을 택했다. 외국인이 많이 찾는 비건식당이라는 특성상 국내 손님과 외국 손님이 절반 정도씩 섞여 있는 해방촌은 매력적인 장소였다.

김근호 대표는 심야식당기억을 2020년 오픈했다. 이전에 이자카야 가게에서 익히고 나름대로 발전시킨 ‘고등어봉초밥’ 등 개성 있는 요리를 소화하기에는 해방촌만 한 곳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고 한다.

11일 개막식에서 재즈밴드 ‘튠어라운드’가 영화 오에스티(OST)를 주제로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서울신용보증재단 제공

이렇게 꿈을 가지고 모인 이들에게 지난해 10월 일어난 이태원 참사는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당시 해방촌 상권은 2020년부터 3년 가까이 짓눌렀던 코로나19 사태의 영향에서 서서히 회복해가던 참이었는데 이태원 참사를 겪으면서 매출이 또다시 크게 곤두박질했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날은 1년 중 매출이 가장 많았던 날이었어요. 그런데 그다음날에는 드라마틱하게도 매출이 10분의 1로 떨어졌어요. 코로나19 때보다 더 안 좋았어요.”(이진구 대표)

“해방촌에서만 35년 가스 배달을 하신 분 얘기가, 이태원 참사 직후에 가스 배달이 30%나 줄어들었다고 해요. 아이엠에프(IMF) 사태도 겪고 다 겪었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고 할 정도였어요.”(길성연 공동대표)

해방촌 상권이 이렇게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이태원과 해방촌 상권이 깊이 연동돼 있기 때문이라는 게 상인들의 지적이다. “많은 사람이 이태원 왔다가 해방촌에 오거나, 해방촌에 왔다가 이태원으로 갔어요. 그러니 참사가 일어난 뒤에는 ‘이태원 옆 동네’ 가는 것도 꺼림칙하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정다정 대표)

하지만 참사 직후에는 해방촌 상인들도 매출을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마음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태원뿐만 아니라 해방촌에서도 가게마다 핼러윈 장식을 엄청나게 했어요. 그런데 사고가 난 다음날 아침에 보니 모든 가게가 다 장식을 철거했더라고요.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죠.”(박석훈 대표)

그런 추모의 마음 때문인지 참사 직후에는 가게 홍보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사고 직후에는 추모가 우선이었어요. 사람을 모으는 홍보를 하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였어요.”(정다정 대표)

지난 13일 저녁 해방촌 거리. 비가 오는 가운데 영화 상영에 30명 넘는 시민이 참석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이런 상황에서 지난 3월 서울신용보증재단 용산지점에서 골목상권 활성화를 위해 지역축제를 함께 하자고 제안해왔다고 한다. 상인들로서는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다. 서울신용보증재단 용산지점 권태유 팀장은 “용산구청, 숙명여대 캠퍼스타운사업단, 용산구 상공회, ㈔서울경제인협회 용산지회 등으로 구성된 용산구 지역경제활성화협의체 실무위원회에서 논의한 결과 해방촌의 지역적 특성 등을 고려할 때 영화제가 가장 적합한 축제 유형이라는 판단을 내렸다”며 “서울신용보증재단에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축제 유형이었지만 해방촌 골목상권 활성화를 위해 과감히 시도해보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때마침 지난 4월부터 남산을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해방촌 상권도 다시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국제단편영화제를 잘 조직하면 골목상권 회복에 속도가 붙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단은 이후 해방촌 상인 등과 협의하면서 프로그램을 갖춰나갔다. 재단은 또한 서울시에 있는 대사관 47곳에 영화제의 취지를 설명하고, 작품 협찬을 요청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그 결과 주한 ‘리스트헝가리문화원’에서 영화 <리퀴드골드>를 추천작품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한 결과 영화제 운영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 지난 11일 저녁에 열린 개막식에 많은 사람이 참여하면서 상인들의 가슴에 자신감이 되살아났다고 한다.

권태유 팀장은 “박희영 용산구청장을 비롯해 김용호·최유희 시의원, 이스트반 메드비지 헝가리문화원 원장과 일반 시민들이 참석해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지난 11일 개막식을 마친 뒤 시민들이 카페 그랩어 4층에서 개막작인 <마더 인 로>를 감상하고 있다. 서울신용보증재단 제공

영화제의 핵심인 영화 상영도 시민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랩어’를 비롯해 칵테일바 ‘까르마’, 반려견 동반 카페 ‘드도트’, 뮤직바 ‘더 스튜디오 HBC’ 등 상영관으로 바뀐 해방촌 내 매장들에는 날마다 40~50명분의 자리가 모두 매진됐다.

또한 배우 손수현과 김예은이 함께해준 16일과 17일 저녁의 ‘토크 프로그램, 19일 저녁 6시에 진행된 ‘큐브 캔들 제작 원데이클래스’, 그리고 21일 저녁 ‘더 스튜디오 HBC’에서 영화 상영 뒤 진행된 재즈 공연도 호평을 받았다.

이와 함께 영화제 기간 방문객들을 즐겁게 한 또 다른 이벤트는 할인쿠폰 증정 행사였다. 재단이 행사 기간에 결제한 금액에 대해 1만원당 5천원씩 해방촌 골목상권 내에서 쓸 수 있는 쿠폰을 ‘쏜’ 것이다.

해방촌 상권의 상인들은 영화제 상영의 여세를 몰아 매출 회복에 적극 나서겠다는 자세다.

해방촌 골목상권 부활을 본격화하기 위해 올해 초 ‘해방촌상가번영회 회장’ 직을 맡은 박석훈 대표는 “상가번영회의 활동을 본격화하기 위해 지난 9월 초 비영리단체 등록까지 마쳤다”며 “앞으로 상가번영회 회원들과 협의해 녹사평역 2번 출구에서 해방촌으로 오는 길에 벼룩시장도 열고, 전망이 좋은 루프톱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런 노력을 통해 ‘꿈을 찾아 해방촌에 온 많은 소상공인’이 다시 ‘꿈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