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엔 ‘하천 복개’ 상징, 2000년대엔 ‘하천 복원’ 상징

서울을 변화시킨 10대 사건 ⑩ 서울의 성장과 청계천의 변화

등록 : 2023-09-21 16:15

중랑천의 지류, ‘한양 도읍’ 되며 큰 변화

늘어나는 인구에 쓰레기·배설물 쌓여

태종 때 개천도감, 영조 때 준천사 설립

수표교 등 다리 세우고 준설공사 등 벌여


일제 땐 김두한과 하야시의 격투 장소

해방 뒤 무허가 판잣집 빼곡히 들어서


1961년 복개 뒤 타 지류들 따라서 복개

환경 중요성 커지며 복원에서도 선두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며 어디에 궁궐을 건립할 것인지 여러모로 따져봤다. 그리고 마침내 북악산을 주산으로, 남산을 안산으로 하며 낙산과 인왕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하는 지금의 서울 사대문 안을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그런 뒤 풍수지리상 주산인 북악산과 명당수인 청계천 사이에 경복궁을 지었다.

조선이 한양을 도읍으로 결정하기 전까지만 해도 청계천은 그저 중랑천의 지류에 불과한 자그마한 자연하천이었다. 하지만 일국의 도읍이 되면서 인구가 늘고 그로부터 나오는 쓰레기와 배설물이 쌓이면서 하천을 자연 그대로 둘 수가 없게 됐다. 우선 배수시설이 필요했고 여름 장마에 대비해 하상을 넓고 깊게 파야 했다. 이런 이유로 태종은 개천도감을 설치해 제방을 돌로 쌓고 중요 다리는 돌다리로 바꾸었다. 이러한 조치는 세종 등 이후 임금 때도 이루어졌는데, 가장 크게 준설공사를 벌인 것은 상설기관으로 준천사를 만든 영조 때이다. 그 증표는 ‘경진지평’(庚辰地平)이라고 새겨진 수표교 다리에 남아 있다. 경진은 영조 36년의 간지로 그해에 준설한 개천 바닥의 표준을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청계천은 조선시대 내내 치수사업이 전개되면서 ‘개천’(開川)이란 보통명사로 불렸으나, 일제강점기 ‘청계천’이란 지금의 고유명사가 부여되면서 현재 우리는 청계천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경복궁 서북쪽을 흐르는 청계천 상류인 청풍계천(淸風溪川)의 준말이다.

본래의 수표교를 다시 가져오지 못하고 새롭게 건설된 현재의 수표교.

일제 때 청계천은 종로구와 중구의 단순한 행정구역의 경계만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이라는 민족적 대립의 경계이기도 했다. 그래서 종로 깡패 김두한과 혼마치(충무로) 깡패 하야시가 격투를 벌인 곳도 바로 청계천 수표교였다.

일제강점기에도 청계천 준설은 이뤄졌지만 주로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청계천 이남의 지류가 주요 대상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군수물자의 신속한 수송을 위해 교통로 확보가 중요해지면서 1937년부터 청계천 본류에 대한 복개공사가 본격화됐다. 하지만 이후 5년 동안 광화문우체국에서 광통교까지 복개한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뒤 아무런 도시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서울의 급속한 인구증가가 이루어지면서 청계천 주변으로 판잣집이 빼곡히 들어서게 됐다. 물론 이승만 정권에서도 청계천 복개는 일부 진행됐다.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조금씩 진행됐을 뿐이다.

그러나 1961년 5·16쿠데타 이후 들어선 군사정부는 그해 12월 동대문 오간수교까지 복개하여 바로 청계천로 개통식을 오간수교 위에서 거행하면서 “군사정권이 정말로 일은 잘한다”는 인상을 주기까지 했다. 주변의 판잣집도 모두 철거했다. 이로써 그동안 더러웠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지고 코에서는 악취가 느껴지지 않으면서 서울시에는 그야말로 하천 복개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동안 생활 속에서 함께 존재했던 중학천, 청운천, 성북천 등 청계천의 자그마한 지류도 모조리 복개했을 뿐만 아니라 사대문 밖의 만초천, 아현천 등도 복개했다.

세종 2년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한 수표가 설치된 다리라 하여 수표교라 이름 지어졌고, 1958년 청계천 복개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2005년 청계천 복원 때 복원된 청계천의 폭과 다리 폭이 맞지 않아 여전히 장충단공원에 남아 있는 수표교.

한편 청계천 복개로 새로 생긴 청계로는 당시 너비 50m로 강남 개발 이전, 1960년대 후반기만 해도 유일한 큰 도로였다. 당시에는 지금의 세종대로도 이렇게 넓지 못했다. 이렇게 확보된 도로는 1967년을 지나면서 새롭게 변화했다. 김현옥 서울시장이 여기에 고가도로를 건설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 계획을 상의한 인물은 서울시 해당 부서 관계자들이 아니라 외부의 건축가 김수근이었다. 마침 1964년 도쿄올림픽 준비의 일환으로 일본에서 여러 고가도로가 건설됐고, 이런 일본의 움직임이 우리 사회에도 긍정적으로 평가되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김수근이 일본에서 공부했다는 점이 그와 연결된 요인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미아리고개에서 청계천로, 그리고 신촌, 홍제동까지 연결하는 유료도로를 구상했다. 하지만 당시 서울시에 등록된 차량은 고가도로 없이도 차량 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었기에 여러 반론이 나왔다. 이런 반론들에도 군 출신의 김현옥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비록 처음 계획에서 많이 후퇴했지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선이 있었다. 광교에서 청계천로를 거쳐 용두동에 이르는 노선이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 당시 외국인이 많이 머물던 워커힐까지 오가는 것을 쉽게 하기 위한 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1961년 청계천 복개 1단계 완공식을 거행했던 오간수교 자리에서 바라보는 2023년 현재 새로 복원된 청계천의 모습.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쳐 1969년 3월 개통식을 거행했지만 건설 직후부터 안전 문제가 불거졌다. ‘3·1고가도로’라는 이름으로 개통된 이 도로는 미8군 차들은 이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파다할 정도였다. 시설 자체의 안전이 문제일 수 있고, 복개시설 자체도 문제일 수 있었다. 복개된 하천 바닥에 메탄가스가 발생해 폭발할 수도 있다는 말이 많았다.

이런 문제를 안고 복개한 하천이기에 그것은 그로부터 약 30년 동안 서울의 교통과 지형에 큰 영향을 줬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청계천 복개와 고가는 점차 서울시의 변화에 부담이 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2002년 서울시장 선거 때 이명박 후보는 ‘청계천 복원’을 1호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가 당선되자마자 첫 번째로 한 사업이 바로 고가도로 철거와 복개된 청계로를 다시 걷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복개된 청계천은 더는 자연하천이 아니었다. 하천수를 펌프로 공급하는 인공하천으로 우리 곁에 돌아왔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은 그 이후 우리나라에 복원 바람을 일으켰다. 그동안 복개됐던 성북천, 불광천 등 각종 하천이 ‘친환경’이란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청계천은 서울시 등지의 하천이 복개되는 데도 복원되는 데도 일종의 신호탄 구실을 한 셈이다.

이런 역사를 가진 3·1고가도로는 훗날 서울시가 발간한 안전백서 <서울은 안전한가>(1995)에서 청계천고가도로 항목에서 ‘설계자 미상’으로 표기돼 있었다. 하지만 그 설계는 김수근이 설립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에 왜 ‘설계자 미상’으로 표기했는지 알 수 없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그림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