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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내적인 망명, 그걸 인정해주면 안 될까요?

장난감 갖고 노는 40대 중반 남편 둔 아내, “도대체 왜 그럴까요?”

등록 : 2017-01-05 16:51
 
Q) 제 남편은 매우 특이한 버릇을 갖고 있습니다. 40대 중반의 나이이건만 날마다다시피 자기 방에서 장난감을 조립하고 부속품 납땜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결혼해서 아들이 생긴 뒤에, 함께 장난감 갖고 노는 모습이 소통 잘하는 아빠로 꽤 멋있어 보였는데, 아들이 이미 장난감을 떠난 지 오랜 지금까지 여전한 남편의 모습은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게다가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피규어 수집에도 열성적이어서 작은 집의 공간을 엄청 차지할 뿐 아니라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어떻게 해야 아이 같은 취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마흔 갓 넘긴 여자의 고민입니다.

A) 수집벽이 있는 남편을 두셨군요. 제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회사의 중견 간부인 제 지인 한 명 역시 지독한 장난감 마니아입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립식 자동차, 전투기, 탱크 등 일명 ‘프라모델’(플라스틱 모델의 일본식 줄임말) 수집 취미에 40년 동안이나 푹 빠져 있습니다. 이미 성인이 된 아들이 있는데도, 그는 60~70년대 장난감 헬기 상자까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의 취미방에는 집에서 애지중지하는 고양이조차 절대 출입금지라고 합니다.

“제가 수집했던 것 가운데 하나는 4000원에 샀는데, 지금은 30만원을 호가합니다. 먼지를 닦아내고 다시 조립할 때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아마 모르실 겁니다.”

그의 얼굴은 50대 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일화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재즈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한 중견 언론인은 최근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요즘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긴 쉽지 않다. 내가 그렇게 믿을 뿐 남이 보면 꼭 미친 사람 행태다. 어제 오늘 새벽 이베이 입찰을 통해 구한 50~60년대 재즈 LP(엘피). 아직 이것보다 두 배 많은 판이 포스팅을 기다리는데 30장 제한에 걸려 있다.”

여기서 ‘엘피’란 미국에서는 ‘바이닐’(VINYL)이라고 하는 구식 레코드판입니다. 또 다른 날에는 이런 고백을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어제 새벽과 오늘 새벽 사이, 단골 셀러가 큰 장을 여는 바람에 50~60년대 재즈판을 많이 샀다. 참을 수 없는 클릭질에 다 털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면서도 올해 열심히 이베이질을 한 나를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73장.”

이쯤 되면 마니아, 그 가운데 젊은 층에서 말하는 ‘덕후’급입니다. 홍대 근처 옛 팝송 음악을 중점적으로 틀어주는 제 단골 엘피 바의 주인은 수집벽이 지나쳐서 아예 가게를 차린 경우입니다. 음향시설이 좋고 약 1만4000장의 희귀한 엘피를 소장한 이곳은 음악 마니아들에게 소문난 곳인데, 여기에 오기까지 부인의 고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요즘도 거의 날마다 한두 장씩 엘피판을 산다니까요. ‘오늘 귀한 것 나왔습니다’라는 전화가 어디선가 걸려오면 마치 아이처럼 흥분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저는 어떻겠어요? 그 사람의 취미가 일로 연결되어 그나마 다행이죠, 뭐!”

60세 남편은 음악에 푹 빠져 있고 가게 운영은 부인 몫인데, 이곳에서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많이 만나 새로운 인생을 발견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었습니다. 서양미술 전문가인 제 친구 역시 수집광으로서 절대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오피스텔 하나를 얻어서 연구실로 쓰고 있는데, 이곳에는 구형 카메라뿐 아니라 다양한 모양의 후추 그라인더, 원형과 타원형 거울, 손잡이 장식이 독특한 와인 글라스, 그리고 만년필까지 다양하게 모으고 있었습니다.

“수집가들은 철저히 남이 갖고 있지 않은 희소성 있는 물건을 모으는 데 기쁨을 느껴! 그것을 찾아내고 누군가 알아줄 때, 쾌감이 있다고 할까?”

우리 사회도 이제는 획일화된 취미에서 벗어나 무척이나 다양하고 세부적인 세계를 찾는 전문 수집가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만의 온라인 카페나 거래시장에서 정보 교류와 거래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하신 남편의 경우 특이하기는 하여도 병적인 경우는 아닌 듯싶습니다. 정신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쓰레기조차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혹은 성애 대상자의 모발이나 팬티, 브래지어, 스타킹 등을 광적으로 모으는 사람을 ‘페티시스트’(fetishist)라 하여 병적인 집착으로 정상적인 수집 활동과 구분합니다.

사회 한편에서 단순한 삶을 추구하자는 미니멀리즘이 늘어나고 있다면, 또 다른 한축에서는 전문적인 수집가의 대열도 그만큼 늘어나고 있는 거죠. 물론 한국의 주거 공간을 감안할 때, 또 빠듯한 생활비를 넘어서는 취미생활은 부담이고 부부 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만의 놀이터를 갈망하는 것은 남자들 특유의 로망이 아닌가 합니다. 무선으로 헬기 조종하기를 좋아하는 50대 아저씨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저도 이러는 제가 싫을 때도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가 유일하게 조정할 수 있는 대상이 이것 하나뿐인 것 같아 여기에 집착하는 듯싶습니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 아닐까요? 우리는 나이 들어서도 저마다 꿈과 상처를 동시에 안고 삽니다. 다른 곳에서 채워지지 않을 때, 장난감 혹은 수집이라는 곳으로 내적인 망명을 떠납니다. 과도한 경제적 부담만 아니라면 집을 놀이터로 삼은 남편들은 그래도 안전한 편이라 생각합니다. 최소한 바깥으로 튀어나가 엉뚱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글 손관승 세한대학교 교수·전 iMBC대표이사·MBC 기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