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종점마을을 가다

재개발 바람도 피해 간 산비탈 고을

종로구 장수마을·돌산마을

등록 : 2017-01-19 14:33

종로03 마을버스는 종로5가에서 낙산공원을 오간다. 그 길에는 단종과 정순왕후 부부의 애달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청룡사’, ‘쌍룡아파트 2단지 입구’ 등 정순왕후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정류장을 지나면 종점인 ‘낙산공원’이 나온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낙산의 북동쪽은 ‘장수마을’로 알려진 삼선동이고, 남동쪽은 ‘돌산마을’로 알려진 창신동이다.

동망봉에 서린 님 그리는 마음

작은아버지(세조)에게 왕의 자리를 빼앗긴 조카(단종)의 이야기 뒤에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의 이야기가 있다. 열일곱 나이에 유배지 영월에서 죽은 단종, 정순왕후 송씨는 그때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다.

단종이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자, 정순왕후는 왕비에서 서인(평민)으로 신분이 바뀐다. 궁에서 쫓겨난 뒤 지금의 창신역 근처에 있었던 ‘정업원’(현재 청룡사 자리)에서 살게 되었다. 종로03 마을버스가 잠깐 서는 청룡사 옆 도롯가에 정업원 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 뒤에는 영조가 친필로 쓴 ‘정업원구기’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알게 된 영조가 정업원 터에 비석을 세운 것이다.

청룡사 맞은편에 남쪽으로 머리를 내민 산줄기 끝자락을 ‘동망봉’이라 한다. 정순왕후는 영월로 유배 간 남편 단종을 그리워하며 날마다 동망봉에 올라 기도했다. 훗날 이를 알게 된 영조가 그곳에 동망봉이란 이름을 짓고 친히 글을 써서 바위에 새기게 했는데, 일제강점기에 채석장이 생기면서 바위에 새긴 글자들이 없어졌다.

정순왕후는 정업원에 머물면서 천에 물들이는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정순왕후가 일했던 곳에 있던 우물이 ‘자주동샘’이다. 종로03 마을버스 쌍룡아파트 2단지 입구 정류장 맞은편 길 아래에 자주동샘이 있다.


82세에 세상을 떠난 정순왕후와 함께한 사람들 가운데는 시장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는 동망봉 남쪽 동묘 뒤에 여인시장이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정순왕후를 도왔다.

뾰족바위가 있는 장수마을

종로03 마을버스의 종점인 낙산공원 정류장에 내린다. 낙산 북동쪽 비탈진 마을을 흔히 ‘장수마을’이라고 하지만, 공식 명칭은 삼선동이다. 한양도성 등 문화재가 있는 산비탈 마을은 재개발도 피해 갔다. 2000년대 후반 마을재생 프로그램을 시작하면서 장수마을이란 이름이 붙었다. 조선 시대에는 ‘혜화문밖’이라 했던 곳이다. 한양도성 밖 성 아래 복사꽃이 피던 마을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사람들이 산비탈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고, 60년대부터 고향을 떠나 서울로 모여든 사람들이 더해지면서 현재 장수마을의 골격이 갖춰졌다.

바위가 그대로 드러난 곳에 집이 들어섰다. 바위 위에 생긴 골목길로 사람들이 다녔다. 바위골목길을 걸어 내려와 성북천을 따라 들어선 장터에서 장을 보고 사람들은 다시 바위골목길을 올라 집으로 돌아갔다. 지금 골목길은 대부분 시멘트로 덮여 있다.

골목길은 미로처럼 얽혔다.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곳을 ‘뾰족바위’라고 한다. 바위에 기대어 집이 들어섰다. 뾰족한 바위 한쪽 면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검게 그을린 부분도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당제를 지냈다고 한다.

돌산마을

종로03 마을버스 종점 낙산공원 남동쪽 마을은 창신동이다. 사람들은 ‘돌산마을’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화강암 지대인 낙산에 채석장이 들어섰다. 덕산파출소 옆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면 채석장의 흔적과 마을을 볼 수 있다. 돌산마을이라는 이름도 이때 붙었다. 이곳에서 채취한 돌은 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 경성역(옛 서울역), 조선총독부 등을 짓는 데 쓰였다.

채석장이 문을 닫은 뒤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마을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돌을 채취한 흔적이 절벽으로 남아 있다. 절벽 바로 아래까지 집들이 들어찼다. 절벽 위에도 집을 짓고 산다. 원호를 그리며 이어지는 채석장 절벽이 마을을 품은 형국이다.

절벽 아래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가면 마을텃밭이 나온다. 서울에서 보기 드문 텃밭이다. 친환경 농사를 체험할 수 있는 도시텃밭이다. 도시텃밭을 지나면 공영주차장이 나온다. 이곳 이름이 당고개다. 인근 안양암 자리에 당제를 올리는 곳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당고개 공원을 지나 왼쪽 골목길로 접어든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빠져나와 좁은 도로를 만나면 좌회전한다. 그 길에 안양암이 있다. 안양암은 1889년에 문을 열었다.

안양암에 들어서면 커다란 바위가 절집을 품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화강암 바위산인 낙산의 진면목을 이곳에서도 볼 수 있다. 주택가 작은 절에서 만난 풍경이 낯설다. 안양암 관음전 안 바위에 관음보살 좌상이 새겨져 있다.

관음전 옆 바위에 쓰인 명문에 따르면, 1909년에 한 석공이 새겼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제의 부당하고 강압적인 식민지배가 시작되기 1년 전에 만든, 조선의 마지막 마애불일 것이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