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가장 번창했던 현 충무로는 일본인이 가장 번성했던 곳이기에 일본을 크게 무찌른 충무공 이순
신의 아호를 따와 충무로라 작명됐다. 사진은 지난날 충무로 입구였던 서울중앙우체국(왼쪽)에서 명동성당 방향의 현재 모습이다.
도로에 붙인 이름, 혼란 피하는 역할
지형·특산물·전설 등에서 명칭 따오고
‘통치체제 역사적 정통성’도 인식시켜
해방 이후 인물·역사 등은 드물게 사용
김구의 호를 딴 ‘백범로’가 유일한 사례
도산 안창호의 묘가 있는 곳 ‘도산대로’
‘율곡로’는 인사동 살았던 이이 이름 따
원효와 무인연 원효로, 추후 동상 세워
어느 나라나 각각의 도로에 명칭을 부여하고 있다. 도시개발과 함께 인구가 늘게 되면, 이동의 편리성을 부여하기 위해 수많은 도로가 생겨난다. 이 도로들에 각각 이름을 부여해줌으로써 상호 혼란이 없는 원활한 공동체사회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도로명은 그곳의 지형이나 특산물 또는 오랜 세월 구전돼오는 전설 등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도시의 주요 도로에 대해서는 통치체제의 역사적 정통성을 인식시키고자 화폐 속 인물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근현대사의 인물이나 사건 등을 그 명칭에 사용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분단 속에서 그 정통성에 대한 시비가 명확히 가려지지 못한 까닭에 주로 식민지 시기 이전인 조선시대까지의 인물과 사건에 국한돼 있다. 서울의 도로명에서 그 유일한 예외가 백범로다. 효창공원에 안치된 백범 김구를 기념하기 위한 백범로(신촌~효창공원)도 1984년에야 제정됐다.
이런 이유로 서울 도로명의 대부분은 조선시대 이전의 고대사를 상상할 수 있는 명칭이다. 결국 도로명은 그 사회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사적 정통성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합의된 역사인식을 도로명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도로명 가운데 유일하게 현대사 인물로 이름 지어진 백범로.(지하철 2호선 신촌역~지하철 4, 6호선 삼각지역). 용마루고개에서 공덕동로터리와 신촌 방향으로 찍은 사진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정부는 가로명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일단 일제강점기 일본식 도로 명칭인 ‘○○통(通)’을 ‘○○로(路)’로 모두 변경하고 또 그 앞의 이름 역시 바꾸며 도로명에 새겨진 일제의 잔재를 지워냈다.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 경성의 가장 중심이었던 본정통(本町通)에 대해 일본을 크게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아호를 따서 충무로라고 고쳤다. 일본에서 본정이란 그 ‘도시의 중심이 되는 곳’을 뜻하며, 통(通)은 ‘길’을 뜻한다. 따라서 본정통은 주요 도시마다 있는 지명으로 예컨대 광주의 본정통 역시 임진왜란 시기 의병장이었던 김덕령의 아호를 따서 ‘충장로’라고 변경했다.
또한 일제의 명칭을 지운 대표적인 또 다른 곳이 충정로이다. 이 일대는 강화도조약 이후 처음으로 일본공사관을 현 지하철 서대문역 인근의 동명여중 자리에 세움으로써 일본의 조선 진출에서 교두보가 된 곳이다. 따라서 일제는 이 일대를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이름을 따서 다케조에마치(竹添町·죽첨정)라 했다. 따라서 이 역시 을사늑약에 분개하며 자결한 민영환의 아호를 따서 충정로라 지은 것이다.
미국대사관(왼쪽 건물)에서 정도전의 집터인 옛 종로구청을 지나 조계사 방향으로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을 기리는 의미로 그의 호를 따서 작명된 삼봉로(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조계사 앞 교차로).
세 번째는 현 소공로이다. 이곳에 있는 황실영빈관 대관정을 당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이 일대 지명을 자기 이름을 따서 하세가와초(長谷川町·장곡천정)라 한 것을 이곳의 옛 지명인 소공동을 지나는 길이라 하여 소공로로 바꾸었다. 이곳이 소공동인 것은 조선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가 이곳으로 출가하여 작은공주골이라 불리던 것을 한자로 소공동이라 표현한 것이다.
한편 중국과 관련한 도로명은 을지로다. 이곳은 본래 을지로 1가와 2가 사이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어 먼 곳에서 이곳을 보면 구리가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다고 하여 ‘구리개’라 불렀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이를 한자로 바꿔 ‘황금정’이라 했다. 하지만 해방 뒤 이를 을지로로 변경했다. 왜냐면 을지로3가의 수표교 일대가 화교가 한반도에 진출하며 처음 화교촌을 형성했던 곳이라 중국 수나라의 침략을 크게 물리친 살수대첩의 주인공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다.
지하철 서대문역 일대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처음으로 진출했던 곳이다. 이에 을사늑약으로 자결한 민영환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아호를 따서 충정로라 작명했다.
이처럼 외세와 관련한 명칭이 생겨난 것과 달리 그 일대 살았던 역사적 인물을 따서 이름이 붙여진 대표적인 곳은 율곡 이이가 인사동에 거주했다고 붙여진 율곡로다. 이 밖에도 삼봉 정도전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삼봉로(미국 대사관~조계사 교차로), 백과사전 <지봉유설>의 집필자 이수광이 살았던 지봉로(보문역~동묘앞역), 도산 안창호의 묘가 있는 곳이라 하여 도산대로(신사역~영동대교 남단)라 부르게 됐다.
또한 해당 인물이 실제 살았던 적은 없지만 그 일대 들어선 기관·학교 등의 상징성으로 지어진 도로명도 있다. 예컨대 1970년 남산 기슭에 어린이회관이 건립되고, 이듬해 어린이운동의 창시자 소파 방정환 동상도 세워지자 그 앞을 지나는 도로를 소파로라 했다. 또 서초구의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서울교육대학 앞을 지나는 도로는 이율곡을 키워낸 신사임당을 따서 사임당로로 정했다. 한편 남산 소월로는 도로명 제정 당시 그 도로변에 김소월의 시비가 있다는 점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퇴계 이황과 지리적 인연은 없지만 율곡 이이를 기리는 율곡로가 생기는 상황에서 조선 유학의 양대 산맥인 퇴계 이황을 기리는 도로명도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지어진 퇴계로(서울역~신당역). 사진은 퇴계로에서 가장 번화한 신세계백화점(왼쪽) 일대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적 건물이나 동상조차 없었음에도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차용한 도로명도 있다. 서울 도심을 지나는 퇴계로는 퇴계 이황의 호를 땄지만 이 도로와 이황은 아무런 인연이 없다. 이황 동상 역시 남산에 있다. 하지만 이 도로를 퇴계로라 정한 것은 해방 뒤 율곡로를 제정하며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 유학의 양대 산맥인 퇴계 이황의 이름을 가진 도로명도 가져야 한다는 이유에서 지어졌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원효로다. 누구나 이 명칭을 듣는 순간 원효대사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원효로는 원효대사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 이 명칭은 1946년 가로명제정위원회가 지은 이름인데 충무로, 을지로 등과 달리 어떠한 작명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굳이 그 근거를 상상해본다면 일제강점기 이 일대를 모토마치(元町·원정)라 했는데 여기서 ‘원’자와 인근 효창원의 ‘효’를 합성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혹은 당시 가로명제정위원회 팀장이던 초대 서울시장 김형민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그가 불교계의 대표 인물인 원효대사를 기린다는 차원에서 이러한 편법을 쓴 것이 아닌가 상상해본다. 서울시는 이런 비판에 대해 뒷수습하는 형태로 1969년 효창공원에 원효대사 동상을 건립했다.
참고로 강남의 대표적 도로인 테헤란로는 1972년 선정릉(선릉과 정릉)에 묘가 3개 있다 하여 삼릉로라 지은 것을 1977년 서울시와 이란의 수도 테헤란시가 자매결연을 하며 테헤란과 서울에 각각 서울로와 테헤란로를 작명하기로 하며 생겨난 도로명이다. <끝>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