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주인 되기

나의 목소리, 색깔, 표정만 있으면 됩니다

40대 중반 명퇴 가장 “무기력에 무척 우울한 나날입니다”

등록 : 2017-02-09 16:23
 
Q) 벌써 2월, 음력으로도 설이 지나 많은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말하지만 제게 이 계절은 무척이나 초라하게 느껴집니다. 지난해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명예퇴직으로 나와 몇 달 놀 때만 해도 해방감에 들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해가 되면서부터 부쩍 조바심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가족들도 처음에는 수고했다며 격려하던 분위기에서 출근하지 않고 날마다 집에 있으니 이제는 무능한 가장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혼자 씁쓰레 생각합니다. 아이들과의 관계도 이전만 못한 듯싶습니다. 시간이 거듭될수록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습니다. 남편으로, 아버지로, 또 한 명의 아들로, 제가 세상에 별로 쓸모가 없어진 것은 아닌지 무력감에 무척이나 우울한 나날입니다. 저는 40대 중반의 가장입니다.

A) 아! 외로운 40대 가장이시군요? 자신감 붕괴, 자존감 붕괴, 자괴감이라는 반갑지 않은 3종 폭탄 세트를 맞고 계시는 느낌이 지금 제 자리에까지 그대로 전해집니다.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전혀 짐작도 못 하는 심적 고통의 나날이리라 생각됩니다. 제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약 4년 전, 비슷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퇴직 후 약 두 달 동안 거의 매일 깊은 잠 속에 빠졌습니다. 아마도 오랫동안의 긴장과 피로가 누적되어 요즘 말하는 ‘번아웃’(탈진) 증상이었던 듯싶습니다.

금방 그다음 자리가 보일 줄 알았는데, 몇 달이 훌쩍 지나가더군요. 그즈음의 남자 나이는 자본이 아니라 부채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지식과 기술, 경험을 빌려 가려고 경쟁하는 훌륭한 자본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도 떠안기를 거부하는 부채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죠. 참으로 유감스럽고 씁쓸한 자각이었습니다.

직장에서 조기 퇴직하면 가장 나빠지는 것은 자녀와의 관계라고 합니다. 일과의 대부분을 직장과 바깥에서 보내던 가장이 어느 날 갑자기 집에 들어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가장의 입장에서는 ‘관심’이지만, 자녀의 입장에서 그것은 ‘간섭’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양자 사이의 관계가 그러했기 때문에 낯선 탓이죠. 부부 사이도 비슷합니다. 집에서 가정일에 의견을 말하면 시시콜콜 참견하는 그릇 작은 남자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평일 낮, 부인이 편하게 쓰던 시간의 자유, 공간의 자유, 선택의 자유가 없어졌기 때문일 겁니다. 소주 한잔 하고 귀가하는 길, 골목길에서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리지는 않으셨나요?


“나는 돈 벌어오는 기계가 아니야, 아니라구!”

점차 오십견이 다가오는 것처럼 마음의 근육도 뭉치고 기분도 자주 상합니다. 사소한 일에 복수를 결심하기도 하지요. 허세와의 싸움도 시작됩니다. 주머니 사정이 뻔하면서 모임에서 가장 먼저 계산대로 달려가고는 합니다. 삶에는 목숨 걸지 않으면서, 산에는 목숨 거는 유형도 제법 많습니다. 평일 등산이지요. 상당수는 혼자 가지 않고 꼭 누군가를 부릅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어딘가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서겠지요. 등산은 당구장과 더불어 직장을 잃은 남자들의 사랑스런 놀이터입니다.

바로 그럴 즈음 저는 <그림동화>에 나오는 ‘브레멘 음악대’라는 이야기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할 테니 간단히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당나귀는 평생 열심히 살았지만 나이가 들어 쓸모가 없어졌다며 주인이 죽이려고 합니다. 때마침 브레멘 음악대장이 단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기 위해 길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당나귀는 브레멘으로 향하는 길에서 노래를 잘하는 수탉, 입 냄새가 심한 개, 쥐를 잡지 못한다고 쫓겨난 고양이를 만나 곧 친구가 됩니다. 그들 모두는 이용가치가 없어진 불쌍한 처지들이지요. 요즘으로 하면 구조조정, 효율, 인공지능, 세계화, 혹은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멋진 이름 앞에서 속수무책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 가장들의 삶을 의인화한 것입니다. 마치 오렌지의 내용물을 모두 짜내서 단맛을 빼내고 난 뒤 쓰레기통에 매몰차게 던져지는 껍질 신세와 같다고 해야 할까요? 이 동화를 무심히 읽을 수만은 없는 이유입니다. 함께 떠나기를 망설이는 수탉에게 당나귀는 이렇게 권유합니다.

“죽음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너는 찾을 수 있을 거야. 너는 훌륭한 목소리를 지녔고, 우리가 함께 연주를 하면 좋을 거야. 우리와 함께 브레멘으로 가자!”

혼자는 무력하지만, 함께하면 무한한 힘을 내는 마력이 있습니다. 친구, 동료, 가족들과의 관계를 서둘러 복원시켜야 할 이유입니다. 가장 든든한 힘이 되니까요. 이 동화에서 ‘죽음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이라는 표현은 너무도 유명한 말입니다. 땅에 떨어져 무참해진 자존감에 이처럼 멋진 위로의 말과 응원가가 어디에 있을까요? ‘훌륭한 목소리’라 표현되는 자기만의 기술이나 쓸모는 누구나 있습니다. 그거만 있으면 됩니다. 반드시 필요한 시기가 옵니다. 꼭 옵니다.

무력감에 시달리던 저도 1년 반의 시간이 지나 기적처럼 제가 할 일을 찾았습니다. 내 목소리, 내 색깔, 내 표정만 있으면 됩니다. 서두른다고 기회가 저절로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안식년이라 생각하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세요. 기회가 오면 더 멋지게 장식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브레멘 음악대’를 다시 읽어보세요. 죽음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미래는 열심히 준비하는 자의 것이지, 미리부터 걱정하는 자의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점, 명심하세요!

글 손관승 세한대학교 교수·전 iMBC대표이사·MBC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