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주인 되기

시시비비 가리지 말고, 그냥 들어주세요

엄마에게 폭발한 큰언니의 반란에 당황한 막내 “연이 끊어질까 두려워요”

등록 : 2017-02-16 14:19
 
Q) 저희의 문제는 큰언니의 우울증(?)으로 인한 집안의 갈등입니다.

간략하게 저희 집은 네 자매이고 저는 그중 막내입니다. 친정아버지는 돌아가셔서 친정어머니 혼자 대구에 살고 계시구요. 자매들이 서울, 울산, 대구에 각자 살고 있어서 자주 모이지 못하지만 그래도 모두 시집가서 30년 넘게 큰 문제 없이 잘 지냈고 사이좋은 자매라 여겼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첫째 언니가 갱년기와 함께 우울증이 오면서 가족들을 멀리합니다. 본인의 삶이 이렇게 된 것이 모두 가족들로 인한 것이라 생각하면서 저희와의 모든 접촉을 끊어버린 것인데요.

제 추측입니다만, 첫째로 자라면서 맏이의 책임감, 엄격함을 어쩔 수 없이 받게 되고 어머니의 냉담함으로 인한 상처가 어렸을 때부터 지속되었고,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스트레스로 쌓인 거 같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한번 어머니와 큰소리로 다투면서 참아왔던 것들을 다 터뜨렸는데, 문제는 상대방이 80대 노인이 된 어머니라는 점입니다.

본인이 했던 일을 전혀 기억 못 하시고, 설사 했다 하더라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그래도 내가 엄마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러냐”는 주장이어서 큰언니로서는 엄마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기대했다가 더 실망하고 우울해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거기다 큰언니는 엄마가 무시하니, 동생들도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생들은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생각이에요.

처음엔 오해를 풀기 위해 사과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먼 지방에서 서울까지 찾아가 얘기도 나눠보는 등 큰언니의 맘을 되돌려보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에요. 그리고 자매들은 그간 자신들이 살아온 세월에 대해 마치 고해성사하듯, 큰언니 앞에 털어놓게 되었습니다. 본인들도 죽을 만큼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있었다고요.

그러다 보니 또 네 자매의 몰랐던 개인사를 모두 다 알게 되고, 그렇게 속속들이 다 알아버리게 되니, 자매들을 만나도 예전만큼 맘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이제 어머니 팔순 생신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대로 해결 못 하고 넘어가면 분명 큰언니는 참석하지 않겠지요.

솔직히 노인이 된 어머니를 이제 와서 변하게 만든다는 건 무리일 거 같고요, 우리가 둘 사이의 깊은 골을 메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자매들이 따로 해야 할 일은 없을까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면 골이 더 깊어져, 가족 간의 연이 아예 끊어질까 두렵기도 합니다. 캣

A) 중년 이후 여성들의 심리적 반란을 갱년기 우울증 탓으로 돌리는 것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노화에 따른 단순한 생리적 현상이 아니고, “더 이상은 이렇게 참으며 살지 않겠다”는 일종의 몸부림일 겁니다. ‘참을 만큼 참았다. 그러나 더 이상은 세상의 요구에 따라 살지 않겠다’라는 자기 선언이지요. 인내가 한계치에 다다라 내면 깊숙이 숨어 있던 개인의 욕구와 욕망과 감정이 폭발하듯 올라온 것이지요.

그런데 이 경험의 내용과 강도가 개인마다 굉장히 다릅니다. 우울해지는 방식으로, 또는 화를 내고 원망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혼이나 가출 등의 돌발적인 행동을 통해서 참았던 마음을 드러냅니다. 어떤 태도가 정상이다, 지나치다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혹시 동생들이 언니의 분노를 우려하면서 어서 화를 풀라고 설득하려 한 것은 아니었나요? 이제 와서 어쩌겠어. 나도 고통이 있었지만 다 참았어. 그러니 가족의 평화를 위해 언니도 참아, 라는 식의 논리로 말이지요. 그랬다면 언니는 무시당한다고 느꼈을 것이고, 가족들은 역시 달라진 게 없다고 노여워했을 겁니다.

큰언니의 갑작스러운 반란으로 네 자매의 관계에 균열이 생긴 것 같은데, 저는 그 점이 희망적으로 보입니다.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관계 아래 숨겨진 불편함을, 숨겨진 진실을 큰언니가 드러나게 했네요. 이제 가짜 관계에서 진짜 관계로 전환되기 위한 기회가 마련된 것입니다.

인생의 어떤 위기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심리적인 문제도 예외가 아닙니다. 융 심리학은 중년기에 뜻하지 않게 맞닥뜨린 신경증이 우리를 성숙하게 완성해줄 중요한 신호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우울, 불안, 분노, 불면증 등은 우리가 외면한 욕구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이며, 삶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인이라는 겁니다.

캣 님의 큰언니가 경험하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사실 자기 돌봄, 자기 사랑에 대한 간절한 바람입니다. 이제까지 큰언니는 어머니의 태도를 내면화해서 자기 자신을 엄격하고 냉담하게 대하며 살았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자신에게 충분한 인정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중년의 시기는 거듭 태어나는 시기입니다. 청년, 자식, 부모 등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본연의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내면의 요구에 직면합니다. 이때 자신의 인생과 인간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과 회의가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익숙한 고통, 낡은 삶의 방식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소 가족에 대한 의존과 동일시, 의무감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재탄생을 지켜봐줄 따뜻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겠지만 주위 사람들의 지지도 필수입니다.

큰언니의 변화 과정을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큰언니가 하는 말의 시시비비를 가려주려 하지 말고 그냥 들어주세요. 그랬구나. 그럴 만하다. 언니가 이해돼. 우리가 알아봐주지 못해서 미안해, 라고 말한다면 정말 감동일 겁니다. 그러면 큰언니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면서 스스로 균형을 잡아갈 것이고, 한층 성숙한 중년과 노년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오래 흥미롭게 지켜봐주세요. 그녀가 펼치는 변화의 길은 우리 여성들이 언젠가는 지나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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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미라 마음칼럼니스트·<천만번 괜찮아> <치유하는 글쓰기> 저자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