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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인 통역, ‘좋은 한국 인상’ 심어줘요”

외국인 민원 통역하는 동작구 공무원 정지연·박경은 주무관

등록 : 2024-02-29 15:25
동작구에서 외국인 민원 통역관으로 활동하는 정지연 운영지원과 주무관(왼쪽)과 박경은 동작구보건소 감염병관리과 주무관이 동작구청 1층 민원실에서 외국인 생활가이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동작구, 2020년부터 ‘민원 통역관’ 운영

올해는 외국어 능통한 직원 8명 자원

‘길안내·서류 발급·부동산’ 사례 다양

“‘도움 줘 고맙다’ 말 들을 때 보람 느껴”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라야 하듯, 한국에서는 한국 법을 따라야 하죠. 우선 상황을 잘 설명해 이해시켜야 합니다. 외국인이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기준을 명확히 알려줘야 하죠.”

정지연(43) 동작구 운영지원과 총무팀 주무관은 16년차 공무원이다. 정 주무관은 2020년부터 외국인 민원 통역관을 자청해 본업 외 통역 일도 맡아 한다. 지난 22일 동작구청 1층 민원실에서 만난 정 주무관은 “서류를 발급받는 등 단순한 내용도 있지만, 법률관계가 얽힌 경우가 있어 복잡할 때도 있다”며 “그럴 때는 외국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동작구는 구청이나 동 주민센터에 민원이 있는 외국인을 위해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3개 국어 민원 통역 서비스를 하고 있다. 지난해 동작구 외국인 주민은 1만5556명으로, 지난해 한 해 동안 외국인 민원은 1만6399건이었다. 외국인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인데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 주민을 대할 때면 항상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구는 늘어나는 외국인 민원을 더욱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2020년부터 외국어 실력이 뛰어난 구청 직원을 ‘통역관’으로 선정해 외국인 통역을 맡기고 있다. 올해는 통역관 8명이 평소에는 맡은 업무를 하다가 필요한 부서에서 요청이 오면 통역한다. 외국인 민원은 민원서류 작성 안내부터 부동산이나 법률 관련 등 다양하다.


정 주무관은 집 문제로 구청을 찾은 한 영국인의 민원을 통역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영국인이 한국에 와서 집을 샀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해당 지역 주민 90%가 찬성해 개발 지역이 됐는데, 지난 연말 이 외국인이 법률상담을 요청해 약속을 잡았다. “사유재산을 왜 국가 마음대로 하느냐며 스트레스를 무척 받았어요.” 전문 용어가 많아 따로 시간을 내 공부도 하고, 한 번 만나면 2시간 넘게 통역했다. 정 주무관은 “문화나 사회적 맥락이 달라서 이를 이해시키는 데 무척 힘들었다”며 “재산권이 걸려 있어 할 수 있는 데까지 지원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래서 글로벌지원센터에서 부동산 상담, 외국인 서비스 상담, 무료 법률 상담 등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정 주무관은 “이후에도 세 차례 정도 만나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상세하게 알려줬다”며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줬으니, 이제 본인의 선택만 남은 것 같다”고 했다.

약속을 잡고 오는 사람도 있지만 급하게 전화 연락을 하거나 구청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화가 나서 오는 외국인도 있죠. 이런 상황에서 통역하기는 무척 어려워요.” 한번은 차량을 견인당한 외국인이 구청으로 온 적이 있었다. “무척 화나 있었어요. 차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당연하겠죠.” 그럴 경우 아무리 통역을 잘해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먼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한 뒤 음료수 등을 내주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우선이다. 정 주무관은 “화가 난 외국인 민원인을 진정시키고 절차를 차근차근 알려줬다”며 “그래도 차를 찾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고 했다.

“문제 파악이 먼저 돼야 통역을 잘할 수 있어요. 해당 업무 지식이 없으면 통역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요.” 주차견인, 주택정비사업, 가로정비사업 등 분야마다 전문 지식이 있어야 통역 민원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정 주무관은 “민원인에게 도움을 줘야 하니 미리 공부하고 가야 한다”며 “배경 지식이 있어야 문제를 이해하고 더 잘 전달할 수 있다”고 했다.

“일상 회화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선배의 조언을 듣고 영어 회화 테이프를 꾸준히 들었더니 귀가 트였어요.” 정 주무관이 본격적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한 건 대학 때부터다.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는데, 영어 쓰임이 많아 영어를 잘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때부터 꾸준히 영어 실력을 쌓아왔다. “외국어는 ‘자전거 타기’와 같아요. 쉬지 않고 페달을 밟으면 앞으로 잘 갈 수 있지만, 속도를 줄이고 쉬면 넘어지죠.” 정 주무관은 자전거 페달을 밟듯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를 비롯해 관광공사 명예관광통역 안내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며 쉬지 않고 영어 실력을 갈고닦았다. 정 주무관은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돕고 고맙다는 말을 들으면 보람을 느낀다”며 “앞으로도 꾸준히 외국인 민원인 통역으로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제가 중국어를 잘하다보니 팀장님이 적극 추천했어요.” 공무원 생활 2개월째인 박경은(35) 동작구보건소 감염병관리과 주무관은 중국인 민원 통역을 담당한다. 대기업 직원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 산둥성 옌타이에서 6년 동안 살며 중국어를 익혔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생활했어요. 그때 배운 중국어가 성인이 돼서 생업이 됐죠.” 박 주무관은 공무원이 되기 전 대기업이나 정부 산하 기관의 중국 관련 통역과 번역을 담당했다.

“그동안 정부 기관과 일할 기회가 많았는데, 물밑 조력자가 아니라 시민과 호흡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아빠가 편찮으실 때도 동작구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뭔가 막막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했죠.”

박 주무관은 임용 이후 전염병 역학조사를 위한 통역을 주로 맡고 있다. 외국인을 직접 대면하기보다는 전화로 많이 한다. “당사자에게 생활 일정표를 받아야 해요. 그것만 알면 어떤 경로로 누구와 접촉했는지 알 수 있죠. 설득하는 데 무척 힘들어요.” 박 주무관은 “본업인 역학조사 통역 외 외국인 민원 통역 요청을 받은 적은 아직 없다”며 “민원 통역이 들어오면 어려움에 처한 외국인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이충신 선임기자 c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