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종점마을을 가다

증조할머니의 빨래터 골짜기에서 증손자가 뛰어논다

수유1동 빨래골

등록 : 2017-03-09 14:39 수정 : 2017-03-09 19:01
빨래골 계곡. 아직 얼음이 녹지 않는 곳도 있다.
북한산 골짜기가 놀이터이고 칼바위 능선이 동네 뒷산인 아이들이 사는 곳, 49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게가 있는 곳, 증조할머니가 살던 얘기를 듣고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 곳, 빨래골은 강북03 마을버스의 종점이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흐르는 계곡

강북03 마을버스가 수유역에서 출발해 수유1동주민센터 옆을 지난다. 그곳부터 길은 좁아지고 마을버스는 느리게 달린다. 바다에서 살던 연어가 태어나 자란 계곡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마을버스는 도시를 뒤로하고 산과 계곡이 있는 빨래골로 올라간다.

강북03 마을버스 종점이 빨래골이다. 빨래골은 북한산 등산로 입구 중 한 곳이다. 종점에서 내려 오른쪽 길로 올라가면 ‘빨래골공원지킴터’가 나온다. 등산로는 그곳부터 시작된다. 길옆이 계곡이다.

강북03 마을버스 종점 빨래골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에 빨래골 계곡 물도 몸을 풀고 흐르고 있었다. 아직 녹지 않은 곳도 있었지만, 물 흐르는 계곡 돌멩이에 낀 이끼는 푸른빛을 머금었다. 그곳에서 중학교에 다닌다는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빨래골에서 태어났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친구들은 칼바위 능선에 갔으며, 친구들이 올 때까지 계곡에서 놀고 있는 중이라 했다.

칼바위 능선은 빨래골에서 2㎞ 남짓 되는 거리다. 빨래골 마을 아이들에게 북한산 칼바위 능선 정도는 동네 뒷산이자 놀이터다. 신발을 신은 채 계곡에 발을 담그고 계곡 아래위를 오가며 무엇인가를 찾는 아이의 발걸음이 익숙하다. 나무막대 하나 들고 앞개울과 뒷동산을 누비며 해 지는 줄 몰랐던 고향 마을의 추억이 이곳에 살아 있다. 빨래골 아이들은 경칩을 몰랐지만 스스로 경칩이 된 건 아닐까? 겹겹이 옷을 입고 진 데를 피해 걸으며 봄맞이 등산길에 나선 어른들 사이에서 빨래골 아이들이 푸르다.

빨래골 계곡 이끼에 푸른 빛이 돈다.


빨래골 빨래터. 빨래골 사람들이 옛날 이곳에서 빨래를 했다.
조선시대 무수리들의 빨래터

북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계곡으로 모였다. 수량이 많아 일정량의 물이 고이면 넘쳐흐르도록 계곡에 작은 둑을 만들었다. 맑은 물이 사계절 마르지 않는 이곳에 예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빨래터였다. 그래서 마을 이름이 빨래골이 됐다. 빨래골의 유래를 보면, 궁궐의 무수리들이 이곳을 찾아 빨래를 했다고 한다. 답답한 궁궐을 벗어나 경치 좋고 물 좋은 이곳에서 잠시나마 쉬어 가려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칼바위 능선에 간 친구들을 기다린다는 아이에게 그 이야기를 해줬더니 아이가 자신도 이곳이 빨래터라는 걸 알고 있다고 한다. 아이가 알고 있는 빨래터는 증조할머니의 빨래터였다. 증조할머니가 이곳에서 빨래를 했다는 얘기를 해줬다 한다. 증조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4대 집안의 아이였다.

이곳은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조선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들, 맑은 물이 넘쳐흐르는 곳에 모여 살던 빨래골 사람들의 빨래터였다. 증조할머니가 빨래를 하던 곳에서 증손자가 뛰어논다. 봄처럼 푸릇푸릇 통통 튄다. 아이에게 다시 보자는 인사를 하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빨래골 빨래터를 알리는 표지석

대를 이어 마을을 지키는 49년 가게

빨래골 계곡 위에 시인 오상순의 묘와 시비가 있다. 백암배드민턴장 옆 화장실을 지나 산길을 조금 오르다 보면 ‘공초 오상순의 묘’라고 적힌 비석이 나온다. 비석에 있는 화살표 방향에 그의 묘가 있다. 묘 옆 시비에 그의 대표작 <방랑의 마음> 일부가 새겨져 있다. 평생 집 한 칸 없이 살다 간 그였다. 어린아이 같고, 방랑자 같았던 그의 마음이 담긴 시 구절이 시비에 새겨져 있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오 흐름 위에 보금자리 친 나의 혼…’

빨래골 위에 있는 오상순 시인 묘와 시비
올라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빨래터에서 놀던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마을버스 종점을 지나 벽화가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가게가 나왔다. 우연히 들른 가게의 이력이 올해로 49년이었다. 어머니 때부터 가게를 했고, 대를 이어 한 지 20년이 넘었다. 번듯한 건물 1층이 가게다. 한쪽에 두부와 간단한 반찬거리가 보인다. 예전부터 마을 사람들 반찬거리와 식료품, 등산객들 먹을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를 팔았다. 마을에 하나 있던 가게였다. 가게 이름을 따서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을 지었다.

가게 주인에게 마을 이야기를 들었다. 1960~70년대에 무허가로 집을 짓고 살던 사람들도 있었는데, 1990년도에 정부가 무허가 주택을 헐어내고 일정한 넓이 이하로 땅을 팔았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 좁아 길을 넓히기 위해 집을 헐어야 했는데, 당시 ‘특별분양제도’에 따라 헐리는 집은 아파트 분양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빨래골 사람들은 그 덕을 보지 못했다. 임대아파트나 서울시에서 내놓은 장기전세로 들어가야 했다.

빨래골 마을. 오른쪽 길은 복개도로다. 이 길로 마을버스가 다닌다.
예전에는 마을로 드나들던 길이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은 굴다리를 지나면 길이 갈라지는데, 오른쪽 길은 복개해서 새로 낸 길이다. 그 길로 마을버스가 다닌다. 마을버스가 다니는 길을 따라 걷는다. 수유1동주민센터를 지나 수유로로 접어들었다. 길 양쪽으로 기사식당이 즐비하다. 이른바 ‘기사식당 거리’다. 집마다 메뉴가 달랐다. 이른 봄날 빨래골 나들이에 배가 고팠다. 5000원짜리 ‘함박스텍’ 위에 오른 달걀프라이 노른자가 꽃처럼 예뻤다.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