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막걸리이자 ‘북방 황주의 원조’

이인우의 중국 술기행-산둥성 편 ④ 산둥지모황주창의 ‘지모라오주’(卽墨老酒)

등록 : 2024-04-18 15:38
지모황주창 지모라오주 박물관 정면.

중국 문명 여명기 곡물 발효술서 비롯

기장쌀 주원료로 하는 고대전통 고수

남방 소흥주에 맞선 “북방 황주의 대표”

“왕희지 집안, 남방으로 양조기술 이전”


상온서 마시며, 식사 때 500㎖ 이하 적당

지모술 관련 인물 전횡, “담양 전씨 선조”


약술도 유명, 부인과 등 8개과 129종

“‘식약동원’ 공유, 황해문명권 일원 증거”

칭다오시 남쪽 랑야에서 진시황 어주의 후예인 랑야타이 바이주를 맛본 ‘술 나그네’는 발길을 옮겨 칭다오시 북쪽의 지모(卽墨)로 향했다.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 즉묵성(卽墨城)으로 등장하는 고을이다. 지모는 황허 지류인 묵수(墨水) 근처에 있다고 해서 고대부터 불린 이름이다. 동쪽으로 황해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도교의 성지로 유명한 라오산이 있다. 지금은 칭다오에 속한 작은 현급 행정구역이지만, 중국 문명의 여명기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북방 해안 지역의 가장 오래된 정착 농경지의 하나이다.

중국 최초 왕조인 하나라 때부터 있었던 고장답게 술은 일찍부터 제례용품으로 빚어졌다. 수전(水田)농법 이전의 기장쌀(黍米)을 라오산에서 나오는 광천수로 빚은 료주(醪酒·막걸리)가 예로부터 명성이 높았다. 지모 지방 유적지에서는 한나라 때 양조장 모습이 그려진 화상석이 발굴됐는데, 고대부터 이 지방이 명주의 산실이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물이다.

지모황주창 지모라오주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사각 청동솥과 기장쌀. 고대의 제례 솥과 기장쌀은 지모라오주의 오랜 역사를 상징한다.

칭다오시 지모에서 나는 황주(黃酒) 계통의 지모라오주(卽墨老酒)가 그 직계 후예이다. 지모라오주를 생산하는 칭다오시 지모구 산둥지모황주창유한공사(지모황주창)를 찾아가본다.

중국에서 술은 1948년 신중국 성립 뒤 크게 바이주 계통과 황주 계통으로 분류한다. 바이주는 증류한 소주, 황주는 탁주, 막걸리 계통의 발효주이다. 바이주가 12세기 전후 중국에 증류식 소주 생산 기술이 전래되면서 발전한 술이라면, 황주는 곡물의 발효 현상에서 처음 발견한 ‘여명의 술’이다.

바이주가 추운 북방의 술이라면, 황주는 주로 더운 남쪽 지방의 술이다. 바이주는 보통 30~50도의 고도수 술이고, 황주는 8도에서 최고 20도까지 상대적으로 저도수 술이다. 바이주는 주원료가 고량이고, 황주는 쌀이 주원료이다. 황주 계통 중에 지모라오주만은 기장쌀을 주원료로 한다.

신중국 성립(1948) 후 지모황주창에서 생산된 술병과 라벨.

중국에서 황주는 저장성의 사오싱주(紹興酒·소흥주)가 가장 유명하다. 이에 대해 지모라오주는 “북방 황주의 종주”를 자임한다. 사실 황주의 주산지이자 소비지인 남방의 소흥주에 비하면 지모라오주의 명성이 처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곳 지모 사람들은 남방 황주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지모의 양조기술을 전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동진시대 왕희지(303~361)는 중국에서 서성으로 추앙받는 서예가이다. 그의 대표작 <난정서>는 당 태종 이세민이 무덤까지 가져갈 만큼 명품으로 유명하다. 낭야 왕씨는 본래 남방 출신으로 진시황 때 낭야로 이주한 일족이었는데, 훗날 후손 중 한 사람이 남쪽 지방 금릉의 관리로 부임하면서 지모의 양조기법을 가져간 뒤 남방 황주가 비약적으로 좋아졌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근거하면, 사오싱주도 지모라오주가 원조가 되는 셈이다. 산둥에서 가장 오래된 성으로 여겨지는 ‘지모고성’에 왕희지 동상이 있는 것도 이런 전승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모 지방에서 발굴된 한나라 시대의 화상석. 사람들이 양조장에서 술을 빚는 모습을 담고 있다.

지모황주창의 지모라오주박물관을 찾으면 맨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입구에 놓인 사각 청동솥에 담아놓은 기장쌀이다. 기장쌀이야말로 지모라오주의 역사 전통이자 다른 황주와의 차별점이다. 박물관 외벽에도 ‘물은 반드시 향기가 있어야 하고, 기장쌀은 고르게 빻아야 하며, 누룩은 반드시 때에 맞춰 뜬다. 술 담는 항아리가 좋아야 하며, 술을 걸러 담글 때는 반드시 청결해야 한다’는 춘추시대 이래의 양조원칙을 그림과 함께 새겨놓고 있다.

지모라오주가 중국 술의 실제 원형이라는 주장은 한자 ‘주’(酒)에서도 알 수 있다고 한다. 술 주는 물(水)과 유(酉)로 구성돼 있는데, 酉는 술 담는 그릇의 상형문자이자 시기로는 8월을 뜻한다. 수전(水田)이 발달하기 전 8월에 무르익는 곡식은 기장쌀이다. 지모주창 박물관이 기장쌀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이런 원조 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지모고성 안의 ‘서성’ 왕희지 동상. 낭야 왕씨 집안은 지모의 황주 양조 기술을 중국 남방에 전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중추 8월, 기장쌀이 익을 때가 서미양주(黍米釀酒)의 가장 적기이다. 고금중외를 통틀어 기장쌀을 주원료로 술을 빚는 것은 지모가 유일하다. 지모 일대에서 발굴된 5천 년 전의 질그릇 술잔과 한나라 때의 양조장 모습을 담은 화상석 등은 지모양조의 유구한 역사를 말해준다. 춘추전국시대부터 라오주 양조가 매우 성행했는데, 당시의 여흥음료이자 제례품인 료주가 그것이다. 청나라 말기에는 지모성 안에 10여 가의 큰 노주관(황주를 파는 음식점)이 있었고, 1932년 무렵이 되면 라오주 양조장이 500여 가에 이르렀다. 묵수강변 양안에 무수한 노주관이 해방 전야까지 즐비했다.”

지모의 료주는 신중국 성립 뒤 사설 양조장이 국영화될 때 지모라오주로 상표가 단일화됐다고 한다.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 거의 폐업 위기까지 몰렸다가 개혁개방 시대를 맞아 빠르게 회복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등장하는 지모고성. 산둥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성의 하나이다.

그럼 황주 계통의 지모라오주는 어떻게 마시면 가장 좋을까. 우선 일반적으로 황주는 상온 상태에서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 날씨가 차서 덥혀 마시고 싶을 때는 40~50도 정도 온도가 좋다. 지모라오주도 마찬가지다.

기본 도수가 11.5도인 지모라오주는 향형으로는 불기운이 밴 초향형(焦香型)과 맑고 상쾌한 청상형(淸爽型) 두 종류(술병 라벨에 표시)가 있다. 초향형은 육류와 채소류, 청상형은 해산물 요리와 잘 어울린다. 모두 상온에서 마시며 계절적 구분도 없다. 향형의 선택은 전적으로 마시는 사람의 취향에 따르면 된다. 황주는 본래 식사와 함께 마시는 반주형 술로서, 지모라오주는 식사당 500㎖를 넘지 않는 것이 건강 증진에 좋다고 한다.

지모황주창의 지모라오주 저장고.

지모라오주가 역사적으로 유명한 것은 <사기> ‘열전’에 나오는 제나라 장군 전횡(田橫)의 고사에 힘입은 바 크다. 전횡은 한나라 고조 유방과 경쟁하다가 자결한 인물로 사마천은 충절과 절개의 인물로 높이 평가했다. 전횡과 함께 서해의 섬으로 들어가 농성하던 부하 500명도 전횡을 따라 죽었다는데, 이들이 결사할 때 마신 술이 지모료주, 즉 지모의 막걸리였다. 역사에는 자결한 것으로 기록됐지만 사실 이들은 서해 여러 섬에 흩어져 살았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군산 지방의 전씨들은 전횡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고, 서해의 소청도, 외연도, 녹도 등에서도 수호신으로 받들고 있다.

현대에서는 중국의 저명한 소설가 라오서(1899~1966)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1930~40년대의 칭다오는 베이징, 상하이와 더불어 가장 서구적인 도시로 많은 신학문 지식인, 문인이 모여들었는데, 라오서를 비롯한 ‘모던보이’들이 모임을 할 때면 늘 마시던 술이 “중국의 가장 오래된 술” 지모라오주였다고 한다.

지모라오주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지모 료주(막걸리) 양조 장인의 토용.

지모황주창은 지모라오주 외에도 전통적인 약술 제조로 유명하다. 지모시과학기술협회와 산둥지모황주창, 지모시중의원이 공동편찬한 <지모라오주 약방회편>이란 책을 보면, 부인과의 배란주를 비롯해 내과, 소아과, 미용과 등 모두 8과 129종의 약술 재료와 제법, 효용 등을 정리해놓고 있다.

지모의 약주는 우리나라의 약술에 대한 인식과 매우 흡사하다. 음식과 술의 원류를 같은 것으로 보는 이른바 식약동원(食藥同源) 사상은 고대 동이족 계통의 전통사상으로, 황해를 사이에 두고 ‘양안’(兩岸)이 공유해왔음을 지모의 약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모라오주 원주를 장기 숙성하는 전통식 저장 항아리.

지모를 비롯한 산둥 해안 지방은 고대에는 동이족의 한 갈래인 래이(萊夷)의 땅이었다. 산둥에 있는 동래라는 지명이 한반도 서해안을 지나 부산 동래로 이어져 있다. 서복의 불로초와 <심청전>의 용궁설화가 “비슷하고”, 제나라 전씨와 담양 전씨처럼 조상이 “같다”. 5천 년 황해문명권의 역사가 지모의 술잔에 담겨 있다. <끝>

글·사진 이인우 저술·번역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