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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민주주의 근간은 협치, 협치의 뿌리는 소통

은평구 퍼실리테이터 양성, 민관 협치 활성화 기본조례 제정 등 민관 거버넌스 강화

등록 : 2017-03-23 16:14 수정 : 2017-04-12 22:42
올해로 7년 차를 맞은 ‘은평누리축제’는 기획부터 출연, 운영 등 축제 전반을 주민이 주도하고 관이 협력하는 은평구의 대표적인 협치 사례다. 은평구청 제공
“자원순환센터 절대 반대” “자원순환센터 건립할 때 주민들 의견 수렴을 하고 제대로 건립하자” 메뚜기다리 정자에서 열린 진관동 참여예산 현장 소통데이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에 참여한 주민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그러나 표정은 밝았다. 소통은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고, 서로 다른 의견도 결국 모두를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는 더 많은 주민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진관동 참여예산위원회가 마련한 행사다. 격월로 열리는 행사는 공무원이 현장에 나와 사업에 대해 설명하고, 주민들은 토론해서 의견을 수렴하고, 그것을 행정에 반영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진관동 일대 8개 주요 사업 현장을 돌아보는 지난 18일 행사에는 주민 40여 명과 담당 공무원, 은평구의회 의원 등이 참여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고영호(58·자유한국당) 구의원과 이연옥(59·더불어민주당) 구의원은 한목소리로 “행정뿐 아니라 예산 심의에도 주민의 수요를 확인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라며 더 많은 주민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

협치 행정 통해 공동체 발전 도모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는 김우영 은평구청장의 “정책 발굴과 집행 그리고 평가에 이르는 과정에 평범한 주민의 참여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실천하는 행사다. 2010년 7월 민선5기 은평구청장에 당선된 김 구청장은 취임사부터 ‘주민이 주도하고 행정이 협력하는 협치’를 강조해왔다.

2010년 서울시 자치구 가운데 최초로 ‘주민참여 기본조례’ 제정, 공무원과 주민들의 토론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생활 속 수요 현장 간부회의’, 마을총회 등 주민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와 장치는 은평구 행정 곳곳에서 쉽게 발견된다. “민과 관이 함께 모여, 정책을 만들고 공개하며 검토하는 과정을 통해 주민자치가 실질적으로 구현될 것”이라는 김 구청장의 기대가 담긴 제도들이다.

은평구는 2016년 외부 공모와 평가에서 113개 사업이 상을 받아 111억원의 재정 인센티브를 받았다. 투명한 행정 역량을 평가하는 정부 3.0 평가에서 3년 연속 수상하고, 책임과 효율 행정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정부합동평가에서 2년 연속 우수지자체로 선정되고, 매니페스토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은평공유센터가 최우수상을 받는 등, 수상 사례도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다. 그동안 강조해온 협치 행정이 만들어낸 결과다. 특히 다른 지자체에 비해 이웃돕기 성금과 적십자회비 모금 실적이 높은 것은 협치를 하면서 공동체를 발전시켜온 사례로 손꼽힌다.

협치를 앞세운 은평구의 자치행정이 순탄한 여정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2013년 ‘역촌동 골목길 화단 조성’ 사업은 주민제안으로 시작됐지만, 사업 지역 주민의 반대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주차난이 심각한 골목에 화단을 만든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반대 의견 때문이었다. 일부 적극적인 주민들의 의견이 전체의 의견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

은평구는 공무원들에게 주민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방법을 교육하고, 회의도 토론 방식을 도입해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은평구에서 민과 관의 토론은 일상화됐다.


“공무원이 일방적으로 내용을 설명하던 회의에서 서로가 토론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어요. 주민들도 쉽게 꺼내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낼 수 있어 너무 좋았어요.” 지난 10일 열린 ‘공공·작은도서관 연계 협력 간담회'에 참석한 정재은(44)씨는 바뀐 회의 진행 방식을 만족스러워했다.

은평구의 협치 주체는 청소년도 예외가 아니다. 청소년이 성인에게 가려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청소년참여위원회’를 2011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은평구청 제공
주민자치를 제대로 실행하려면 더 많은 주민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깨달은 건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다 같이 돌자 동네 한 바퀴’ 행사가 원활하게 치러지는 데는 퍼실리테이터로 참여한 전용희(42)씨와 퍼실리테이터 모임 ‘은평소통이룸’의 공이 크다. 행사를 주도한 김병무(58) 진관동 참여예산위원장은 “참여한 주민들이 모두 의견을 말하지는 않아요. 서먹하기도 하고, 잘못 말했다가 망신당하는 건 아닌가라는 염려도 있기 때문인데, 오늘은 퍼실리테이터 분들의 도움으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라며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에 흡족해했다.

퍼실리테이터는 서울시가 주민의 의견을 듣기 위해 청책토론회 등에 도입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퍼실리테이터는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는 주민뿐 아니라 침묵하는 주민까지 자유롭게 소통에 참여하도록 돕는 조력자다. 목소리가 큰 주민이 회의나 토론을 주도하는 걸 방지하고 회의 참석자들이 골고루 자기 의견을 내도록 돕고 참가자 서로가 존중하는 회의 문화를 주도한다.

은평구의 퍼실리테이터는 모두 17명. 지난해 전씨가 참여예산사업으로 제안해 마련된 ‘퍼실리테이터 양성 과정’을 수료한 주민들이다. 마을활동가로 활동하면서 주민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퍼실리테이터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 전씨는 “퍼실리테이터라는 개념이 주민들에게 너무 낯설어 사업 선정에서 탈락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예상과 다르게 주민투표에서 2위로 선정될 만큼 인기가 높았어요”라며 주민들의 소통에 대한 욕구가 표로 표출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퍼실리테이터 공무원 채용도

양성 과정을 신청한 40명 가운데 수료자는 17명으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교육과정도 7개월로 길고 교육과정 또한 녹록지 않았다는 뜻이다. 제안자인 전씨도 양성 과정을 수료한 뒤 퍼실리테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양성 과정을 수료한 황인수(45)씨는 지난해 10월 은평구 참여구정팀에 채용돼 공무원 신분으로 활동하고 있다. 하영호 은평구 민관협치담당관은 “주민 간의 회의에 소통 확대 노력뿐 아니라 간부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퍼실리테이션에 관한 교육도 점차 늘릴 계획이다”라며 황씨를 채용한 이유를 설명했다. 은평구는 지역 내 다양한 회의에 퍼실리테이터를 파견해 회의 방식에 변화를 꾀하고 있다.

은평구는 올해 구 주민참여위원을 126명에서 150명으로, 각 동의 참여예산위원도 30명에서 50명으로 늘렸다. 더 많은 주민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것이다. 또한 안정적인 협치의 지속과 활성화를 위해 지난달 27일 ‘은평구 민관 협치 활성화를 위한 기본조례’도 제정했다.

김정엽 기자 pkj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