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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공원에 나무를 심고, 제 마음엔 희망을 심었습니다”
등록 : 2024-06-13 15:46 수정 : 2024-06-13 22:52
김보근 선임기자의 노을공원시민모임 ‘숲 만들기’ 활동 동행기
서울 도심 속 98m 높이 옛 쓰레기 산을 ‘천이숲’으로 바꿔나가
시민 1100여 명, ‘1천 개미’ 활동…“숲 만들기에서 중심 역할”
나무 심기, ‘고해성사’처럼 느껴지지만
‘나는 선한 역할 하는 존재’ 자각해가며
“마치 나무 된 듯”…숲과 함께 변화 소망
“도토리를 3차례에 나눠서 ‘시드뱅크’에 듬뿍 넣어주신 뒤 단단하게 묶어주세요. 빈 공간이 생기면 싹이 나오지 않습니다.” 지난 1일 오후 2시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공원 안에 있는 노을공원 정상. 시민단체 ‘노을공원시민모임’(이하 노고시모)의 강덕희 활동가가 10여 명의 시민 앞에서 시범을 보이며 말했다. 노고시모는 ‘쓰레기 산’이었던 노을공원을 자연천이가 가능한 숲으로 만드는 활동을 하는 단체다.
노을공원은 1978년부터 1993년까지 15년간 서울시민이 버린 쓰레기가 쌓여 만들어진 ‘산’이다. ‘난지도 제1 매립지’로 불렸던 이곳의 쓰레기 높이는 무려 98m에 이르렀다. 서울시는 매립이 끝난 뒤 먼지, 악취, 파리 떼가 들끓던 쓰레기 더미 위에 방수포를 씌우고 1m 정도의 흙을 쌓는 등 안정화 작업을 거친 뒤 2002년 5월1일 월드컵공원 문을 열었다.
노고시모는 그로부터 9년여 뒤인 2011년 8월23일 창립총회를 열었다. 서울시가 노을공원에 골프장을 건설하자 10년 가까이 반대운동을 벌여 마침내 노을공원을 ‘가족공원’으로 되돌린 40여 개 시민단체가 힘을 모았다. 단체들은 당시 노을공원이 ‘생태적 기능’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중심에 숲 만들기가 자리했다.
이날 강덕희 활동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시민들이 바로 이 ‘숲 만들기 활동의 핵심’이다.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로 불리는 이들은 자발적으로 나무 심는 활동에 참여한다. 왜 ‘개미’일까? 노을공원의 숲들을 하나로 연결하면 진짜 자연천이가 가능한 하나의 숲이 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줄 사람들이니 개미라는 표현을 붙였다. 현재 1100여 명의 시민이 개미로 활동하고 있다. 모두 노고시모 카페(cafe.daum.net/nanjinoeul)에서 개미 활동을 위해 노고시모에 가입한 시민들이다. 개미들은 카페에서 자기가 활동이 가능한 시간에 숲 만들기 활동을 신청한다.
강 활동가의 설명이 끝나자 3명씩 한 조를 이룬 개미들이 ‘시드뱅크’에 흙을 담고 도토리를 넣었다. ‘씨앗제방’이란 뜻의 ‘시드뱅크’는 흙이 몹시 부족한 쓰레기산에 도토리들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참나무가 되는 것을 돕는다. 땀 흘려 시드뱅크에 흙과 도토리를 채우는 ‘개미’들의 모습이 밝다. 모두 도토리를 심으면서, 자신들의 마음에도 ‘밝은 무엇’을 심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는 도토리를 심으면서 제 마음에 ‘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심었습니다. 제가 심은 도토리가 결국 크게 자라 열매를 맺고, 또 그 열매가 다시 또 더 많은 나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사원인 임소현(34)씨는 “대부분의 사람이 사회생활을 익명으로 해 존재감을 찾기 어려운데, 이곳에 오면 나 자신을 찾게 되는 것 같다”며 “그래서인지 씨앗 심는 활동은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게 하는 힘이 돼준다”고 말했다.
임소현씨와 같은 교회에 다니는 박지혜(36)씨는 “그 ‘가능성’을 생태적 문제에 적용하면 ‘생명과 희망’이 된다”고 했다.
“요즘 지구가 많이 아프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더욱 많은 사람이 씨앗과 나무를 심으면 자연이 아프지 않았던 예전 ‘생명의 시기’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금성출판사에서 초등학교 음악교과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박아름송이(31)씨도 노고시모 활동을 통해 그런 ‘생명과 희망’을 강하게 경험한다고 말했다.
“살아가면서 제가 하는 행동이 선한 영향을 주는지 안 주는지를 항상 생각해요. 하지만 사회생활을 할 때는 시야가 좁아져 그런 효능감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제 행동이 그렇게 큰 행동이 아닌데도, ‘나도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노고시모는 ‘생명과 희망’을 실천하고자 하는 바로 이런 시민들이 모인 곳이다. 노고시모의 ‘생명과 희망’에 대한 염원은 ‘집씨통’(집에서 씨앗 키우는 통나무) 활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집씨통은 통나무를 깎아 만든 작은 ‘도토리 묘목장’이다. 개인이나 기업이 신청하면 흙과 도토리 씨앗을 담은 집씨통을 보내준다. 신청한 집씨통을 받은 개인 등은 100일 이상 물을 주어 싹을 틔운 뒤 다시 노고시모에 보내온다.
나무의사인 최영선 노고시모 상임대표는 집씨통에 대해 “2020년부터 2023년까지 모임이 금지됐던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노을공원에서 숲 만드는 활동도 크게 위축됐다”며 “집씨통은 이런 시기에도 숲 만들기에 대한 생각을 이어갈 수 있도록 시작한 활동”이라고 설명했다. 최 대표는 “지난해에도 기업과 시민들이 약 6500개의 집씨통을 신청했다”고 덧붙였다.
집씨통 활동은 또 노고시모의 철학이 담긴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와 관련이 있다. ‘천이’는 어떤 생물 군락이 환경 변화에 따라 새로운 식물 군락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말한다. ‘천이숲’은 이런 천이가 일어나는 숲을 가리킨다. 왜 천이숲이 필요할까. 최영선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현재 노을공원에는 자연적으로 뿌리 내린 아까시나무가 많은데, 아까시나무의 수명이 40~50년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나무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까시나무가 사라지기 전에 참나무 등 다른 나무가 자라나야 하는데, 노을공원은 고립된 곳이어서 다른 나무가 잘 뿌리 내리지 못하는 환경입니다. 그래서 개미들과 함께 도토리를 심고 뿌리 내리게 함으로써 천이 과정을 돕는 것입니다.”
노고시모는 시민과 기업이 보내온 어린 참나무를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뒤 이를 노을공원과 하늘공원 사면에 있는 천이숲 만들기 47개 권역에 심는다. 이날도 개미들은 시드뱅크로 도토리 심기를 마친 뒤 3년 정도 자란 참나무를 들고 노을공원 남쪽 사면으로 이동했다.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 정수희(30)씨는 남쪽 사면으로 이동하면서 “오늘 나무를 심으면서 제 마음에는 표지판을 심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표지판은 “‘그동안의 내 행동으로 인해 지구 환경이 이렇게 된 것 아닌가’ 하는 경고의 표지판이면서 ‘아직 늦지 않았다’는 희망의 표지판”이다. 몇 년 전부터 남편 이해민(27)씨와 함께 환경단체 와이퍼스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정수희씨는 “앞으로 희망의 표지판이 더 커질 수 있게 더욱더 많은 사람들과 힘을 모아나가고 싶다”고 했다.
‘빈스먼스’라는 커피 관련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남편 이해민씨는 “노고시모 활동에 참여하면 내 마음에 ‘여유와 활력’을 심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함께 이동하던 개미 김성열(37)씨도 “나무 심기를 통해 마음속에 깊은 휴식을 심은 듯하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희망의 표지판으로 가야 할 길이 아직 멀지만, 지난 13년 동안 이어져온 노고시모 활동 또한 이미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는 점을 강조한 말이다. 노고시모는 창립 이후 시민·기업과 함께 47개 권역에서 숲 만들기를 하고 있고 이제 모든 권역을 개미집처럼 연결하여 공원을 하나의 숲으로 만들고 있다.
개미들이 도착한 노을공원 남쪽 사면은 아직 거친 모습이 군데군데 보였다. 드문드문 철근이 삐져나온 모습도 눈에 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문화기획자 위최서린(28)씨는 “나무 심기가 마치 고해성사 같다”고 했다.
“환경에 관심 있다고 말하면서 고기 먹고 택시 타기 좋아하는 저 자신에 대해 고해성사하는 마음입니다. 말하는 내용에 못 미치는 제 행동을 보면서 어떤 죄책감 같은 것도 느끼게 됩니다.” 위최서린씨는 “앞으로 고해성사를 더 자주 해 죄책감을 없애야겠다”며 웃었다.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보건교사로 일하는 김민지(26)씨는 “나무 심기를 통해 세로토닌이 주는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씨는 ‘행복 호르몬 세로토닌’은 ‘쾌락 호르몬인 도파민’과 대비된다고 설명했다. 게임이나 영상 등을 볼 때 생성되는 도파민은 중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명상 등을 할 때 분비되는 세로토닌은 정서적 안정감, 소소한 일상이 주는 행복감, 공감 등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나무를 심는 활동이 지구와 환경을 생각하는 ‘움직이는 명상’처럼 느껴졌다.
오후 5시. 약 3시간 동안 진행된 숲 만들기를 마친 개미들이 활동을 정리하기 위해 노을공원 주차장 한편에 마련된 노고시모의 ‘컨테이너 사무실’로 향했다. 참나무와 아까시나무를 비롯한 각종 나무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오솔길을 걷는 개미들을 위해 햇살을 가려주고 있었다.
오솔길을 걸어가던 수술실 간호사 문은주(27)씨는 “뭔가 새로운 걸 시작할 수 있는 뿌리를 심은 것 같다”고 말을 꺼냈다. 붉은 피를 자주 접하는 문씨는 초록이 좋아 가끔 숲을 찾는다. 그는 지난 3월에도 어머니와 함께 노을공원 옆에 있는 하늘공원을 산책했다. 하늘공원은 ‘난지도 제2 매립지’였다.
그는 그때 숲은 봤지만, 쓰레기 산 위에서 ‘천이숲’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개미들’을 보진 못했다. 하지만 개미가 된 그는 이제 ‘감상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꿔나가는 사람’이다.
문은주씨는 “앞으로는 나무 뒤에 숨어서 활동하는 사람들, 나무 밑에 감춰져 있는 쓰레기더미를 모두 생각할 것 같다”고 했다. “이제 뿌리를 심었으니 앞으로 자주 찾으면서 나도 ‘하나의 나무’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 성교육 교재를 기획하는 일을 하는 이조은(26)씨도 “마치 어떤 자연의 사이클에 동화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고등학생인 17살 때부터 노을공원을 찾아 봉사활동을 해왔던 이씨는 “파괴된 땅이 재자연화되고 회복되는 긴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제는 내가 그냥 그곳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 자연스럽다”고 했다.
서로 얘기하는 사이 어느새 도착한 노고시모 컨테이너 사무실. 김성란 노고시모 운영위원이 환하게 반기며 지친 개미들에게 먹을거리를 챙겨준다.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와 <평화의 산책-생명은 하나입니다>(이상 목수책방 출간) 등 노고시모 활동을 기반으로 한 환경 서적을 펴낸 김 운영위원은 노고시모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무보수로 노고시모 활동을 지원해오고 있다.
“희망의 씨앗을 심는 개미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시민들의 작지만 예쁜 마음들이 씨앗 심듯이 모여서 살아난다면 쓰레기산이었던 노을공원도 천이숲이 될 수 있다는 큰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이숲의 최종 형태인 극상림(구성 수종이나 양이 크게 변화하지 않는 안정된 산림)은 서울과 같은 큰 도시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더욱이 쓰레기 산이 천이숲을 거쳐 극상림이 되는 경우는 세계 어디에서도 없었다. 하지만 나무 심는 개미들의 마음에는 이미 극상림 같은 ‘생명과 희망의 꿈’이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숲 가꾸기 활동을 마치고 올려다본 노을공원은 정말 꿈꾸듯이 의연하게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글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쓰레기 산’이었던 노을공원을 천이숲으로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시민단체 ‘노을공원시민모임’(노고시모)의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이 지난 1일 마포구 상암동 노을공원 정상 나무자람터 입구에서 ‘시드뱅크’로 도토리를 심은 뒤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임소현·박아름송이 개미, 강덕희 활동가, 이조은·김민지·위최서린·문은주 개미, 최영선 상임대표, 박지혜·김성열·정수희·이해민 개미.
숲만들기 활동을 위해 노을공원 정상으로 향하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노을공원 정상에 위치한 나무자람터에서 강덕희 활동가(서 있는 사람)에게서 이날 해야 할 숲만들기 활동에 대해 듣고 있는 1천 개미들.
노을공원 정상 나무자람터에 자리잡고 있는 집씨통(집에서 씨앗 키우는 통나무)들. 씨앗부터 키운 어린 참나무가 자라고 있다. 시민·기업들이 집씨통에 씨앗을 심고 최소 100일 이상 키운 뒤 되돌려주면 나무자람터에서 2~3년 더 키운 뒤 숲을 만들 자리에 옮겨 심는다.
위최서린 개미(왼쪽)와 박아름송이 개미(오른쪽)가 도토리를 담은 ‘시드뱅크’를 외발수레에 올려놓고 있다
시드뱅크에 심어놓은 도토리가 잘 자라나고 있다.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이 노을공원 남쪽 사면에 나무를 심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임소현 개미(왼쪽)와 김성열 개미가 노을공원 남쪽 사면에서 일정하게 자란 나무를 심고 있다.
한강이 보이는 노을공원 남쪽 사면에서 1천 개미들이 지난해 심어 놓은 도토리가 자라나는 모습을 살펴보고 있다.
노을공원의 숲 조성 정도를 보여주는 이미지. 왼쪽이 노을공원, 오른쪽이 하늘공원이다. 이미지 중 초록색은 천이숲이 돼가는 곳이고 보라색은 아직 숲 조성이 덜 된 곳을 가리킨다. 이 모습이 마치 개미집처럼 보인다. 노고시모는 지난해까지 148종 11만5천여 그루의 나무를 노을공원에, 3만2천여 그루를 하늘공원에 심었다.
글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