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숲길 걷기

서울 최고 메타세쿼이아 숲 “열대 숲 들어선 듯 아찔”

③ 서대문구 ‘안산 자락길’

등록 : 2024-06-20 15:07 수정 : 2024-06-20 16:56
2~3시간 숲‘ 길 걷기’ 코스 서울 50곳 이상

생명 가치 높이는 활동 “나무 알기” 필수

7㎞ 안산 자락길, 데크길·흙길 편히 연결

암수한그루 밤나무, 짙은 꽃내음 뿜고

꿀 많은 쉬나무, 과거 봉수대 설치 증거

“절벽 곳곳에…동네 조난 안 당하게 조심”

메타세쿼이아 숲길

숲에 가면 싱싱한 정서와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녹색 에너지는 건강하고 즐거운 삶에 도움을 주고, 사람은 자연의 일부분이 돼 숲에 활력을 더한다. 숲길 걷기는 자연과 대화하고 공감력을 통해 생명의 가치를 높이는 활동이다.


숲에는 풀과 동물과 흙과 버섯과 이끼 등이 공존하지만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나무다. 양과 기여도에서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만들어가는 핵심 주체가 숲이므로, 결국 나무가 곧 자연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숲길 걷기를 잘하려면 나무와 친해져야 한다.

통곡의 미루나무
숲길 걷기에는 두세 시간은 다닐 정도로 질이 괜찮은 숲이 전제된다. 서울에 그런 곳이 얼마나 있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미 50곳이 넘는 코스를 확인했다. 서대문구의 안산은 그 가운데서도 뛰어나다. 식생 좋은 산 중턱을 둘러서 7㎞의 자락길이 만들어져 있다. 데크길과 시멘트길, 흙길이 편안하게 이어지는 자락길 외에 오솔길도 이리저리 통한다. 보통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4번 출구에서 출발하지만 무악재역이나 홍제역에서 시작해도 된다.

독립문역에서 올라간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처형당한 옛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의 담장 안팎에 ‘통곡의 미루나무’(사실은 양버들로 보인다)가 한 그루씩 마주 보고 있었다. 사형수의 한이 서린 탓인지 안쪽 나무만 잘 크지 못하다가 2017년 수명을 다했다. 이후 뒤따라가듯이, 잘 자라던 바깥쪽 나무도 2020년 태풍에 쓰러지고 만다. 이제 나뭇더미 옆에 새끼 나무만 서 있다.

같은 종의 나무가 생사를 함께하는 현상은 다른 나무에서도 나타난다. 자락길이 인왕산 생태다리 쪽으로 이어지는 갈림길 부근에, 가죽나무의 암나무와 수나무가 길을 사이에 두고 키 자랑을 했다. 몇해 전 수나무가 죽자 안타깝게도 암나무도 말라가고 있다.

이진아도서관 바로 뒤 오르막길의 초입에 키 큰 칠엽수와 이태리포플러, 자귀나무가 숲길 걷기의 시작을 알린다. 봄과 여름에 많은 꽃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나무들이다. 그런데 최근 이태리포플러의 윗부분을 싹둑 잘라(두절) 모양이 이상해졌다.

오동나무

데크길에 들어서면 전망이 확 트인다. 멀리 북한산 남쪽 능선까지 시원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카페쉼터 부근 오른쪽에 멋있는 오동나무가 있다. 빨리 자라는데다 가볍고 해충에도 강해 과거 문갑, 옷장 등 가구용으로 많이 쓰인 나무다. 거문고와 비파 등 악기를 만들면 좋은 소리가 난다. 딸을 낳고 뒤뜰에 이 나무를 심었던 것은, 이런 실용적인 이유에다 (벽)오동나무에만 깃든다는 봉황 같은 사윗감을 기다리는 마음이 작용했을 법하다.

밤나무 암꽃

바로 옆 밤나무에 꽃이 한창이다. 짙은 냄새를 뿜어내는 것은 수꽃이다. 밤나무는 암수한그루다. 많은 식물과 반대로 수꽃은 꽃자루 위쪽에, 암꽃은 아래쪽에 핀다. 작살나무도 깔끔한 꽃을 자랑한다. 산에 흔한 작살나무는 잎자루와 꽃자루가 붙어 있는 반면, 공원에 많이 심는 좀작살나무는 둘이 좀 떨어져 있다. 큰낭아초도 꽃을 피우고 있다. ‘낭아’는 꽃차례가 이리의 이빨 모양이라는 뜻인데, 작고 예쁜 꽃을 ‘흉기’에 빗대는 해학이 재미있다.

큰낭아초

안산 자락길에는 서울 산에 있을 만한 온갖 나무에다 눈여겨볼 만한 군락도 여럿이다. 곧 만나는 숲속광장 쉼터 주변에 쉬나무와 황벽나무 군락이 있다. 둘 다 운향과여서 향이 강하다.

쉬나무 군락

쉬나무에는 꿀이 많다. 영어 이름이 ‘꿀벌나무’(bee tree, 참피나무)를 넘어 ‘꿀벌꿀벌나무’(bee bee tree)다. 열매에서 기름이 많이 나와서 봉수대가 있는 산에는 대개 쉬나무 군락이 있다. 과거 안산의 봉수대는 평안도에서 서울 남산까지 이어지는 봉화 연결망의 마지막 거점이었다.

황벽나무는 속껍질이 황색이어서 고급 목재로 쓰였다. 코르크층이 발달해 손으로 껍질을 누르면 기분 좋은 탄력이 느껴진다. 두 나무의 향을 맡고 만질 수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다.

쉼터를 지나면 길 주위에 히어리를 많이 심어 놓았다. 초봄에 전남 구례 등 남쪽 지방을 굳이 찾지 않더라도 노란 꽃이 봄맞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쪽 나무더라도 서울 시내에서는 대개 잘 자란다. 일종의 열섬 현상이다. 조금 더 가서 왼쪽으로 돌아가는 길가에 좀목형 군락이 있다. 멀리까지 코를 자극할 만큼 꽃의 향이 강하다. 4월 하순의 라일락, 5월 초중순의 아까시나무, 5월 하순의 쥐똥나무, 6월의 좀목형은 ‘꽃향기의 여왕’이라 할 만하다.

메타세쿼이아 숲의 분위기는 서울에서 이곳이 최고다. 서쪽 숲속광장 부근 사면에 수천 그루가 하늘을 향해 키재기를 한다. 위치를 잘 잡아 좌우를 둘러보면 이 나무밖에 보이지 않는다. 숲과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면 오늘의 숲길 걷기는 성공이다. 비가 좀 오는 날이면 더 좋다. 열대 숲에 깊숙이 들어온 듯한 아찔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메타세쿼이아는 수억 년 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화석나무'다. 지구촌에서 가장 덩치가 큰 나무인 미국 서해안의 세쿼이아가 메타세쿼이아의 후손이다. 메타세쿼이아의 실물이 중국 양쯔강 상류에서 발견된 건 1940년대이고, 이후 수십 년 만에 사람의 힘으로 전세계에 퍼졌다. 유전자를 많이 퍼뜨리는 게 생명체의 본성이라면, 나무 역사에서 아주 성공적인 사례다. 다양한 풍토뿐만 아니라 사람 세상과도 잘 어울린다는 뜻이다. 메타세쿼이아 숲을 지나면 벚꽃 철에 제법 명소로 꼽히는 왕벚나무 군락이 나타난다.

산수국

오르막길을 돌아서서 남쪽 자락길로 들어선다. 이곳에서는 느릅나무가 주인공이다. 추위에 잘 견디는 이 나무는 온대 이북 지역에서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신이 천지를 창조한 뒤 이 나무에 혼을 불어넣어 첫 여성을 만들었다는 북유럽 신화가 있을 정도다. 서늘한 기운이 가시기 전에 꽃을 피우고, 작은 꽃이 산길에 자욱하게 떨어질 때 사람들은 봄이 왔음을 안다. 같은 느릅나무과인 느티나무보다 친근하지는 않지만, 거친 수피부터 날카로운 톱니가 있는 잎까지 야성적인 맛이 있다. 목련 종류처럼 수술보다 암술이 먼저 성숙하는 꽃도 원시적이다.

풍성한 숲을 지나 동쪽 길로 접어든다. 흙길인 중턱능선길과 데크길로 돼 있다. 아까시나무가 많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할 일을 다 하고 죽어가는 나무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질소를 고정해 다른 나무에 제공하는 대표적인 나무다. 거친 땅에 자리를 잡고 숲을 만들어가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좀목형

산수국과 바위취 등 그때그때 계절을 빛내는 꽃식물도 반갑다. 산수국은 땅의 산성도가 높으면 파란색, 알칼리성이나 약산성이면 분홍색 꽃을 피운다.

느티나무 가로수와 독립문

다시 독립문 쪽으로 내려온다. 길가의 느티나무는 가로수의 모델이라고 할 만하다. 수가 많지는 않으나 모두 잘 자랐고, 찻길과 공원을 나누며 짜임새 있는 풍광을 만들어낸다. 느티라는 이름의 유래와 관련해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늦게 티가 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꽃이 잘 보이지 않고 잎도 평범하다. 어린나무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존재감이 커져서, 어느새 키다리 아저씨 같은 든든한 이웃으로 자리를 잡는다. 아득한 날까지 우리 땅을 지킬 나무라고 하면 지나칠까.

안산의 ‘안’은 안장을 뜻한다. 정상의 쌍봉이 안장 모양이다. 해발 296m로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절벽이 여러 곳 있어 우습게 봤다가는 ‘동네 산에서 조난하는’ 꼴이 생길 수 있다. 나무는 험한 비탈에서도 서로 도와가며 장하게 숲을 이룬다. 숲은 가치를 인정받는 만큼 혜택을 베푼다. 안산 자락길에는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기다리는 나무가 많다.


글·사진 김지석 나무의사·언론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