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땀 한땀 자수 바느질로 세상을 ‘돋을새김’하다
서울의 작은 박물관 ㊻
등록 : 2024-07-11 14:31 수정 : 2024-07-11 16:13
일제 때 동경서 자수 배운 박을복 선생
66년부터 기능대회 자수 직종장 활동
머리카락으로 수놓는 파격 보이는 등
다양한 기법 실험하며 자수를 ‘예술화’
강북구 우이동 박을복자수박물관
바늘이 지나간 자리에 선이 살아난다. 선과 선이 모인 자리에 형상이 드러난다. 형상은 면 위에서 포슬포슬 피어나거나 그렇게 내려앉는다. 박을복 자수박물관에 전시된 자수 작품을 보았다. 193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박을복 선생의 인생을 한땀 한땀 수놓은 작품들은 돋을새김한 그의 마음이었다.
우이동 북한산 기슭에 피어 있는 자수의 꽃 1915년 개성에서 태어난 박을복 선생은 이화여전 영문과를 거쳐 동경여자미술대학 사범과 자수부에 입학하게 된다. 일본 학생들에게 뒤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배웠다. 일본 문부성에서 주는 자수편물교원자격증을 가지고 귀국, 다음해인 1938년 모교인 호수돈여고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 해 그의 작품 ‘국화와 원앙’이 조선미술전에서 입선했다. 결혼으로 가정을 돌봐야 했다.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이했고,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자수와 자연스레 멀어졌다. 한국전쟁 부산 피란 시절 친척과 지인의 도움으로 자수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이화여전 가정과에 강의도 나가게 됐다. 전쟁이 끝나고 산업 부흥시대에 그는 자수 분야의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기 시작한다. 1966~1973년 전국기능대회에서 자수부문 직종장 및 분과장으로 위촉됐다. 그 전인 1960년에 국제 미술 전람회 등을 다니며 외국의 미술계를 체험했다. 그의 시야가 세계로 넓어지는 계기였다. 1961년 제10회 대한민국미술전 공예부문에 자수 작품 ‘정’이 입선했다. 1962년에는 ‘표정’, 1963년에는 ‘천하대장군’이 입선했다. 1961년에 제1회 개인전을 연 뒤 프랑스 파리, 미국 메릴랜드까지 그의 개인전은 계속 이어졌다. 1969년 우이동 북한산 기슭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해 2002년에 박을복자수박물관의 문을 열었다. 박물관에는 지금도 박을복 선생의 삶의 향기가 그의 자수 작품과 함께 남아 있다. 북한산 기슭 숲의 향기와 초록빛 가득한 정원을 지나 외부 계단으로 올라가면 2층에 박물관 입구가 나온다. 박을복 선생의 대를 이어 오순희씨와 오영호씨가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두 분의 설명과 작품 안내글을 보며 자수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학생 박을복, 일제강점기에 태극무늬 수를 놓다 전시실에서 처음 관람객을 맞이하는 건 1936년 동경여자미술대학에서 직접 만든 ‘자수기법 124종’이었다. 당시 교육과정의 하나로 학생들은 모두 자신이 직접 수를 놓아 자수기법 모음집을 만들어야 했는데, 박을복의 ‘자수기법 124종’이 최고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81가지 밑그림 위에 124종류의 자수기법을 사용해 만든 작품이다.
그다음에 본 작품은 1937년 졸업 작품으로 출품한 ‘국화와 원앙’이었다. 국화꽃과 암수원앙을 표현한 작품인데, 학생 박을복은 그 안에 ‘숨은 그림’을 감춰놓았다. 암컷 원앙에게 구애하는 수컷 원앙의 화려한 자태에 눈길을 빼앗기다보면 여러 송이의 국화꽃은 허투루 보기 십상이다. ‘숨은 그림’은 그곳에 숨어 있었다. 여러 국화꽃의 꽃술 부분을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언뜻 보기에 그 꽃이 그 꽃 같은데 한 송이 꽃의 꽃술이 다른 것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을 발견했다. 그 꽃술에 숨겨진 건 태극무늬였다. 학생 박을복은 졸업작품에 태극무늬를 수놓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태극무늬를 수놓는 학생 박을복의 손은 떨리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 분야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뜻있는 일이었으리라.
1962년 완성한 ‘꿈’은 자연을 대하는 예술인의 마음과 자수 기법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꿈’은 석양을 향해 나는 봉황을 담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해의 빛깔을 표현하고 싶어 해 지는 풍경 앞에 선 날이 많았다. 석양의 강렬한 빛을 바라봤고 그 빛깔을 내기 위해 비단실을 염색하고 혼합해 작품과 같은 해의 빛깔을 낸 것이다. 봉황의 꼬리는 프랑스 자수기법인 휩트 스티치(Whipped Stitch. 사슬 또는 땀을 놓은 뒤 다른 실을 끼워 수놓는 방법)로 장식해 독특하고 화려한 질감을 냈다. 상상 속의 새인 봉황과 황홀한 석양이 한 폭에 어울린 자수는 환상의 세계에 동경의 마음을 담아 ‘꿈’으로 완성된 것이다. 같은 해 완성한 ‘표정’은 인간 군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난십자수, 별무늬수 등 다양한 기법을 살펴볼 수 있다. 1961년 작품인 ‘정’은 경복궁 향원정의 연꽃을 소재로 만들었다. 당시 한 호텔의 벽을 장식하기도 했다. ‘사슴’은 1968년 작품이다.
덕수궁서 열리는 ‘한국 근현대 자수’전에도 출품
1층 전시실로 자리를 옮겼다. 1997년 작품 ‘보고 싶은 얼굴들’ 앞에서 오순희 관장의 설명을 들었다. 설명 첫마디가 “머리카락으로 수를 놓았습니다”였다. 자수의 새로운 기법을 고민하던 박을복 선생의 시도였다. 늘 새로운 시도를 고민하던 박을복 선생의 뜻을 지지하며 딸인 오순희 관장도 머리카락을 모았다. 작품 해설에 옛날 안동 지역에서 일찍 죽은 지아비를 그리워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짚신을 삼아 함께 매장한 사례를 들어 은인 또는 지인을 그리워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썼다. 엄마와 딸의 머리카락을 모아 완성했으니 모녀의 사랑 또한 작품에 담겨 오래 전해질 것이다.
1979년 작품 ‘에펠탑’은 프랑스 유학 중인 딸을 찾아간 박을복 선생이 프랑스 여행에서 본 풍경을 담았다. 국내에서는 수에 사용할 실과 천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으나 여행 중이었던 프랑스에서는 수놓을 실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상에서 쓰던 실을 풀어 수를 놓은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다.
‘수(繡)의 근원’(1980)은 수의 근원인 실을 실로 그려낸 작품이다. ‘실’이라는 한글을 흘려쓰듯 꾸몄다. 그 형상이 산하를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같이 보이다가, 그것이 자수의 한길을 살아온 선생의 삶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
1997년 작품 ‘화투의 이미지’는 화투 그림에 담긴 열두 달을 재구성해서 표현했다. 열두 폭 병풍에 담긴 계절과 풍경을 보고 있으면 세월 따라, 변하는 자연 따라 한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느껴진다. 팔월 동산 위 보름달은 수많은 사람의 기원을 다 품고 말없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1997년에 완성한 ‘집으로 가는 길’은 캔버스에 유채와 자수로 완성한 작품이다. 타원형 분자 구조를 가진 비단실의 한땀 한땀마다 다각도로 반사된 빛이 캔버스 위에서 입체감을 나타낸다는 설명글이 붙었다. 2001년 작품 ‘집으로 가는 길2’는 유채로 밑그림을 그리고 수를 놓아 완성했다. 수묵화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전시된 작품을 하나하나 보았다.
아쉬웠던 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8월4일까지 열리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시에 박을복 선생의 작품도 전시되는 바람에 박물관에서는 그 작품들을 사진으로 봐야 했다. 그길로 덕수궁으로 달려가 실제 작품을 보았다.
그 작품 중에 1937년 작품 ‘국화와 원앙’도 있었다. 국화꽃밭의 한 송이 국화꽃 꽃술에 숨어 있는 태극무늬가 도드라지게 빛났다.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 한가운데 태극무늬를 새긴 것은 제국주의 일본의 황실 중앙에 태극기를 꽂은 것이나 다름없다”던 오영호 관장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영호 관장이 박을복 선생 생전에 국화에 태극무늬를 새긴 이유를 물어봤는데, 그때 박을복 선생은 먼 산을 보며 오랫동안 아무 말을 하지 않다가 “너희들은 식민 치하의 삶을 상상도 하지 못한다”는 말만 남겼다고 한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박을복자수박물관 정원과 박물관 건물. 박물관 건물은 박을복 선생이 살던 집이기도 했다.
박을복자수박물관 1층 전시실. 머리카락으로 수놓은 ‘보고 싶은 얼굴들’(왼쪽)과‘수의 근원’(오른쪽).
박을복자수박물관 1층 전시실. ‘수의 근원’(왼쪽)과 ‘집으로 가는 길’(오른쪽).
바늘이 지나간 자리에 선이 살아난다. 선과 선이 모인 자리에 형상이 드러난다. 형상은 면 위에서 포슬포슬 피어나거나 그렇게 내려앉는다. 박을복 자수박물관에 전시된 자수 작품을 보았다. 193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박을복 선생의 인생을 한땀 한땀 수놓은 작품들은 돋을새김한 그의 마음이었다.
우이동 북한산 기슭에 피어 있는 자수의 꽃 1915년 개성에서 태어난 박을복 선생은 이화여전 영문과를 거쳐 동경여자미술대학 사범과 자수부에 입학하게 된다. 일본 학생들에게 뒤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배웠다. 일본 문부성에서 주는 자수편물교원자격증을 가지고 귀국, 다음해인 1938년 모교인 호수돈여고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 해 그의 작품 ‘국화와 원앙’이 조선미술전에서 입선했다. 결혼으로 가정을 돌봐야 했다. 대한민국은 광복을 맞이했고,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자수와 자연스레 멀어졌다. 한국전쟁 부산 피란 시절 친척과 지인의 도움으로 자수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이화여전 가정과에 강의도 나가게 됐다. 전쟁이 끝나고 산업 부흥시대에 그는 자수 분야의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기 시작한다. 1966~1973년 전국기능대회에서 자수부문 직종장 및 분과장으로 위촉됐다. 그 전인 1960년에 국제 미술 전람회 등을 다니며 외국의 미술계를 체험했다. 그의 시야가 세계로 넓어지는 계기였다. 1961년 제10회 대한민국미술전 공예부문에 자수 작품 ‘정’이 입선했다. 1962년에는 ‘표정’, 1963년에는 ‘천하대장군’이 입선했다. 1961년에 제1회 개인전을 연 뒤 프랑스 파리, 미국 메릴랜드까지 그의 개인전은 계속 이어졌다. 1969년 우이동 북한산 기슭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해 2002년에 박을복자수박물관의 문을 열었다. 박물관에는 지금도 박을복 선생의 삶의 향기가 그의 자수 작품과 함께 남아 있다. 북한산 기슭 숲의 향기와 초록빛 가득한 정원을 지나 외부 계단으로 올라가면 2층에 박물관 입구가 나온다. 박을복 선생의 대를 이어 오순희씨와 오영호씨가 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두 분의 설명과 작품 안내글을 보며 자수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학생 박을복, 일제강점기에 태극무늬 수를 놓다 전시실에서 처음 관람객을 맞이하는 건 1936년 동경여자미술대학에서 직접 만든 ‘자수기법 124종’이었다. 당시 교육과정의 하나로 학생들은 모두 자신이 직접 수를 놓아 자수기법 모음집을 만들어야 했는데, 박을복의 ‘자수기법 124종’이 최고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81가지 밑그림 위에 124종류의 자수기법을 사용해 만든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전시된 박을복 선생의 1937년 작품 ‘국화와 원앙’. 가운데 국화꽃 꽃술 부분에 태극무늬를 수놓았다
1962년 작품 ‘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전시된 박을복 선생의 1961년 작품 ‘정’.
1979년 작품 ‘에펠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