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오른쪽서 ‘백호’ 구실 하는 산
최고 바위산인 설악산을 줄여놓은 듯
신갈·떡갈 등 참나무 구별하는 재미에
눈·마음 호강에다 ‘숲 에너지’까지 받아
인왕산은 한양(서울)이라는 도시의 틀을 이룬 산의 하나다.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볼 때 오른쪽에서 백호 역할을 해왔다. 크지 않은 산이지만 웅장하다. 우리나라 최고의 수려한 바위산으로 꼽히는 설악산을 줄여놓은 듯하다. 이런 산에 괜찮은 숲길걷기 코스가 있다. 인왕산숲길이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로 나와 사직단 정문에서 시작한다. 사직단은 조선 왕조의 정신적 지주 가운데 하나다. 그에 걸맞은 나무가 없으면 섭섭하다. 담장 안쪽의 느티나무, 회화나무, 비술나무 고목은 세월을 담담하게 지켜본 증인과 같다. 특히 큰 키에 섬세한 모습의 비술나무는 희로애락이 가득한 사람의 역사를 보듬는 듯하다. 부근에서 무게를 잡는 상록수는 소나무를 닮았으나 스트로브잣나무다. 근대 이후 언젠가 심었다는 뜻이다. 노숙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사직단과는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 후문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 멋있는 황철나무가 있고 후문 옆에는 다시 비술나무 고목이 여럿 나타난다.
좀 가다가 오랜 활터인 황학정으로 들어간다. 왼쪽 계단 옆에 두릅나무가 한창이다. 잎이 하도 파릇파릇해서 가시까지 반가워진다. 찻길로 올라가 오른쪽의 인왕산숲길 입구로 들어선다.
인왕산은 바위산이어서 나무로선 힘겹다. 경사가 급해 비가 오더라도 곧 물이 말라버린다. 숲길은 산 동쪽 사면 아래쪽의 작은 계곡과 능선들을 옆으로 잇는다. 식생도 좋아 인왕산에서 숲 분위기가 가장 나은 편이다. 바로 아래가 과거 서울에서 문화적 소양이 높고 부와 권력이 큰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서촌 지역이다. 그래서 인왕산숲길 걷기는 역사·문화기행으로도 훌륭하다.
우리나라의 ‘동네나무’인 참나무와 소나무가 대세다. 각각 활엽수와 침엽수를 대표한다. 둘 다 너무 친근해서 계속 안부를 묻게 된다. 참나무에는 성실함과 푸근함이 있다. 다양한 환경에서 잘 자라고 많은 잎과 열매를 만들어 땅과 동물과 사람에게 돌려준다. 목재와 땔감으로도 좋아 버릴 게 없는 나무다. 그래서 ‘참’나무는 말 그대로 ‘진짜’ 나무다. 이 나무와 가까워지면 어느 산에 가도 든든하다.
숲길을 따라 ‘참나무 6형제’(상수리·굴참·신갈·떡갈·졸참·갈참나무)가 모두 나타난다. 잎과 수피의 모습으로 구별할 수 있다.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는 밤나무처럼 잎이 길쭉하다. 굴참나무는 수피에 코르크가 발달해 밀가루 반죽 같은 모습인 반면, 상수리나무는 다소 부드럽게 수직으로 골이 진다. 산 아래쪽에 많은 상수리나무는 여기서도 키가 크고 개체수가 많다. 굴참나무는 대개 건조한 비탈에서 많이 관찰된다. 숲길 오른쪽에 두 나무의 고목이 나란히 서서 친구 사이임을 과시한다.
신갈나무와 떡갈나무는 잎이 크고 물결 모양의 결각이 있다. 모두 잎자루가 없어 잎이 가지에 딱 붙는다. 쉬운 차이는 떡갈나무 잎 뒤쪽의 회색 털과 신갈나무의 반짝이는 줄기다. 추운 곳에서 잘 자라는 신갈나무는 대개 산 위쪽에 많지만 숲길 주위에도 웬만큼 있다. 떡갈나무는 여기서도 개체수가 적다. 흔히 영어 ‘oak tree’를 ‘떡갈나무’로 번역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그냥 ‘참나무’라고 하면 무난하다.
졸참나무와 갈참나무는 둘 다 잎자루가 있다. 졸참나무는 신갈나무처럼 수피가 반짝이고, 갈참나무는 떡갈나무처럼 그렇지가 않다. 졸참나무는 이름의 ‘졸’이 시사하듯 잎과 도토리가 가장 작고 귀엽다. 열매의 맛도 가장 낫다고 한다. 숲길 주위에 갈참나무가 많이 보인다. 굵은 줄기에서 가지가 사방으로 균형 있게 뻗어나가는 ‘나무의 전형’을 보여준다. 마을에 이런 나무가 있다면 그네를 매어 타고 놀기에 제격이다.
2㎞ 정도인 인왕산숲길을 가는 동안 작은 계곡 일고여덟 곳을 지난다. 첫 계곡에 두충 군락지가 있다. 두충은 껍질을 약재로 쓰는 나무로 중국에서 들어왔다. 잎과 열매, 줄기를 갈라보면 흰색의 실 같은 끈적끈적한 물질이 나온다. 전체 느낌은 산뽕나무와 비슷하다. 서촌의 누군가가 실용적인 이유로 심었기에 군락이 생겼을 것이다.
계곡에 이어지는 작은 능선들에는 역시 소나무가 많다. 어디서나 의연한 나무다. 화강암이 침식해 만들어진 굵은 모래땅(마사토)에서도 꿋꿋하게 자란다. 기적 같은 생존력이다. 그러면서도 멋과 운치를 잃지 않는다. 산불에 취약하다고 알려졌지만, 화강암이 많은 우리 산에서 소나무를 대체할 나무가 뭐가 있을지 궁금하다. 팥배나무는 여기서도 존재를 과시한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한두 그루씩 서 있다. 지금 달리는 작은 열매는 겨울까지 새의 먹이가 된다.
수성동계곡에 들어선다. ‘수성’은 물소리라는 뜻이다. 그만큼 물소리로 한몫한 계곡인데, 거의 물이 말라 있어 아쉽다. 비가 오면 이 계곡뿐만 아니라 산 전체가 새롭게 깨어난다. 인왕산숲길 왼쪽은 만만찮은 비탈이고 오른쪽으로는 숲 너머 서촌마을 한옥의 지붕들이 보인다. 과거 시인과 묵객들은 인왕산을 보고 느끼며 시를 짓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100살은 넘음 직한 은행나무 고목이 지켜주는 쉼터가 나타난다. 은행나무는 재배식물이어서 자생력이 약한 편이다. 누군가가 뜻을 갖고 산에 올라 이 나무를 심었을 것이다. 이 나무는 유교와 관련이 있다. 향교 앞에 심은 이유다. 병충해에 강한데다 많은 열매를 맺는 경제식물이기도 하다.
작은 벼랑을 건너는 가온다리에 도착한다. 가온은 중심을 뜻한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자는 취지에서 가온다리라 했다고 설명돼 있다. 그럴듯하다. 크지 않은 계곡이지만 인왕산숲길에서 가장 아름답다. 나무들의 힘이 좋다. 벚나무, 귀룽나무, 물오리나무, 소나무, 딱총나무 등이 골고루 있다. 안내판에 그려놓은 ‘인왕산호랑이’(백호)가 산다면 가장 어울릴 법한 곳이다.
숲길이 끝나는 곳에서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직진하면 윤동주문학관을 지나 자하문으로 간다. 왼쪽 나무 계단으로 올라가 자락길을 통해 돌아가는 코스도 훌륭하다. 후자를 택한다. 찻길 옆 인도를 숲길로 만들어놓아 나름대로 풍취가 있다. 나무 윗부분을 만지며 갈 수 있다. 큰 나무는 위쪽 잎과 가지를 가까이서 보면 생각보다 싱싱해서 다른 나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초소책방이라는 깔끔한 공공시설이 왼쪽에 나타난다. 전망 좋은 복합문화공간 겸 카페다. 책을 보며 쉴 수 있고, 바깥 탁자에서 바람 소리를 들으며 얘기를 나누기도 좋아 인기가 있다.
조금 가서 오른쪽으로 ‘인왕산등산로’라고 적힌 숲길로 들어간다. 과거 군인들이 다니던 오솔길인데, 조용해서 좋다. 울창하게 자란 나뭇가지를 헤치고 지나가는 맛이 괜찮다. 나무의 기운이 그대로 흡수되는 듯한 기분이다. 약수터에서 더 올라가지 않고 왼쪽으로 내려간다. 약수터에는 ‘음용 부적합’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최근 전국 산에서 이런 안내가 늘고 있다. 기후변화로 수량 유지가 잘 안 되는 게 주된 원인으로 보인다.
7월의 숲길은 풍성하다. 꿀 많은 쉬나무의 꽃에는 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구수한 냄새가 나는 누리장나무도 꽃을 피운다. 향기 많은 산초나무에는 앙증맞은 꽃이 가득하다. 산복사나무와 가막살나무, 작살나무, 생강나무, 모감주나무는 예쁜 열매를 달았다. 거친 가시가 돋보이는 쥐엄나무, 꽃 같은 벌레혹(충영)을 열매와 함께 단 때죽나무도 빼놓을 수 없다. 계요등(닭오줌덩굴)의 꽃은 작지만 요염하고, 눈덩이 같은 나무수국의 꽃은 허한 마음을 채워준다.
사직단으로 돌아온다. 산이 많은 서울에선 조금만 발품을 팔면 눈 호강, 마음 호강을 무료로 하면서 숲이 제공하는 에너지까지 받을 수 있다.
글·사진 김지석 나무의사·언론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