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숲길 걷기

100여 종 빼곡한 인공숲 “나무 오케스트라 경험한 듯”

⑥ 효창공원

등록 : 2024-08-01 17:05

김구 묘역 안 팽나무, 그 자체 ‘하나의 숲’

후문 쪽 느티나무, 숲 전체의 틀 잡아줘

얼룩덜룩한 양버즘나무는 겸허한 ‘조역’

구석구석서 의외 나무 만나는 기쁨 만끽

서울 한가운데 있는 효창공원은 ‘효창숲’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곳이다. 근대 이후 긴 시간에 걸쳐 심은 나무들이 다채로운 숲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안산자락길과 인왕산숲길 등은 자연숲과 인공숲이 섞인 모습인 데 비해, 효창숲은 도시 인공숲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효창공원앞역 1번 출구로 나와 5분쯤 걸어 정문(창열문)에 도착한다. 효창숲에는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와 백범 김구의 묘, 운동시설, 대한노인회 건물 등이 자리잡고 있어 숲 구성도 영향을 받았다. 나무 종류는 오히려 더 풍부해져, 4만 평이 되지 않는 터에 100종 넘게 자란다. 구석구석 살펴보면 숲길 걷기의 즐거움에 더해 의외의 나무와 만나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여러 코스가 있으나, 바깥쪽으로 큰 원을 그리며 돌고 다시 안쪽에서 작은 원을 그리면 무난하다.


우선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함께 갖춘 크고 멋진 나무를 찾아보자. 정문 왼쪽 김구 묘역 안의 팽나무는 독보적이다. 경사진 잔디밭에 홀로 서 있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숲이라고 할 만하다. 가까이 가보니 이끼와 풀은 물론이고 작은 나무까지 팽나무 가지에서 함께 산다. 독야청청하듯 우람하면서도, 무작정 키를 키우지 않고 둥그렇게 공간을 넓혀가는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이 나무는 훗날 묘지가 사라진 뒤에도 덧없는 사람의 삶을 흘려보내며 생명력을 과시할 것이다.

후문(북문)과 동문 사이 울타리에 붙어 있는 낙우송은 또 다른 역사의 증인이다. 100살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같은 집안인 메타세쿼이아와 모습이 비슷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심은 역사가 더 길고 열매도 더 크다. 땅속을 헤엄치듯 뻗다가 위로 고개를 내미는 공기뿌리(기근)는 이 나무가 얼마나 큰 존재인지를 알게 한다. 나무는 사람보다 먼저 지구에 나와 진화의 선두에 있고, 어느 동물보다 더 오래 존속할 것이다.

후문 부근의 느티나무와 갈참나무는 넓은 그늘을 제공하면서 숲 전체의 틀을 잡아준다. 당연한 듯하면서 없으면 모든 게 어그러지는 보호자와 같은 나무다. 느티나무는 묵묵히 모든 것을 감싸고, 갈참나무는 장대하면서도 누구나 오라는 듯 부드럽다. 그래서 위안을 얻고 안부만 물을 뿐 머물지 않고 지나간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집과 같아서다. 수피가 얼룩덜룩한 양버즘나무도 고목의 태를 낸다. 덩치로는 어느 나무 못지않지만 겸허하게 비켜서 있다. 조역을 잘하는 것만으로 이 나무의 몫은 충분하다.

굳이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면서 곳곳에서 빛을 내는 나무들이 있다. 모르면 그냥 지나치지만 알고 나면 손을 내밀 수밖에 없다. 정문 오른쪽 임정요인 묘역 옆에 있는 중국굴피나무는 언젠가 심고 방치했으나 스스로 군락을 만들어 잘 사는 사례로 보인다. 키가 크고 귀고리 같은 열매가 예쁘다. 나무 아래에 작은 나무와 풀도 무성해 숲 분위기를 풍성하게 한다. 어디서나 잘 자라는 산뽕나무는 후문 쪽에 몇 그루가 노숙하게 우뚝 서 있다. 윤기 나는 수피와 잎만으로도 존재감이 뚜렷하다. 가지 끝에 작은 꽃을 단 회화나무가 산뽕나무 옆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잎과 꽃을 잘 살피지 않으면 같은 나무로 착각할 수 있겠다.

고욤나무도 스스로 잘 자란다. 과거 숲길 옆에서 손가락만 한 싹을 봤는데 어느새 사람 키만큼 크고 10년쯤 지나니 한참 올려다볼 정도가 됐다. 남몰래 키우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나를 환영하듯이 많은 열매까지 달고 있다. 정문 오른쪽의 서어나무는 늘 그렇듯이 근육질 수피를 자랑한다. 큰 산이라면 더 높게 자랐겠지만 여기서는 다른 나무와 키를 맞춘다.

은단풍은 효창 숲의 숨은 보물이다. 곧은 줄기와 손바닥 모양의 잎, 잎 뒤의 회색 털이 모두 깔끔하다. 이른봄에 서둘러 예쁜 꽃을 피우고, 5월이면 산책로에 열매를 가득 떨어뜨리는 성질 급한 나무이기도 하다. 후문 쪽에 여러 그루의 큰 나무가 있고 정문 쪽에도 어린 나무가 자란다.

동문 부근의 물박달나무는 어지럽게 벗겨지는 은색 수피만으로도 눈에 확 들어온다. 어려서부터 나이 들어 보여 눈을 즐겁게 하는 나무다. 후문 쪽에 몇 그루가 있는 노각나무는 우리 땅의 고유종으로, 독특한 무늬의 아름다운 수피와 하나씩 달리는 우아한 꽃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같은 집안인 동백나무의 꽃과 비교해 덜 화려하고 더 품격이 있다. 노각나무 꽃을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숲길 걷기는 성공이다.

효창공원은 원래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역인 효창원이었다. 일제가 세자의 묘를 경기 고양시로 옮기면서 공원이 됐고, 해방 후에도 우여곡절을 겪고 규모가 줄었으나 꾸준히 관리해 괜찮은 숲을 유지하고 있다.

이후 여러 시설에 맞춰 심은 나무들도 세월이 쌓이면서 멋과 맛이 커진다. 묘역과 담장 부근에 많은 소나무는 숲의 품격을 유지하는 역할을 묵묵히 한다. 정문 옆 담벼락 안쪽에 줄지어 선 소나무는 모두 담 밖으로 가지를 내밀고 있다. 햇볕을 향한 몸부림이지만, 일부러 그렇게 심은 듯 보기에 나쁘지 않다. 백범 묘역 뒤쪽을 병풍처럼 두른 소나무는 그림 같은 공간미를 만들어낸다. 수십 그루 나무가 가지 뻗기를 자제하면서 공간을 나누는 모습은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나무공동체’가 빈말이 아님을 보여준다.

사당 건물 정문 좌우에는 큰 배롱나무가 주인공이다. 배롱나무(목백일홍)는 이름처럼 백일 동안의 여름 내내 더위를 견디며 붉은 꽃을 피우는 ‘구도의 나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주는 무소유를 실천하고 매끈한 가지만으로 겨울을 난다. 절과 무덤과 사당에 많이 심는 이유다. 사당 앞 광장에는 팽나무가 가로세로 줄지어 서 있다. 씩씩하지만 시멘트 바닥에 땡볕이라 생육 상태는 그렇게 좋지 않다.

임정요인 묘역 안 좌우에는 은행나무가 우뚝하다. 엄숙한 자리든 번잡한 곳이든 어디서나 잘 어울리는 나무다. 최근 묘역 주위의 다른 나무들을 베어내고 무궁화를 많이 배치한 것은 생물다양성 면에서 문제가 있다. 여러 종의 나무가 묘역을 감싸고 지켜주는 게 더 친근하고 지속적이지 않을까.

공원수 또는 정원수로 꾸준히 심은 나무들은 숲의 맛을 풍부하게 하고 재미를 더하는 역할을 한다. 정문 안 광장 가장자리에 단아하게 서 있는 종비나무는 우리나라에는 자생하지 않고 백두산 부근에 가면 많다. 덜꿩나무와 털설구화는 비슷한 모습으로 붉은 열매를 달고 있다. 자생종인 덜꿩나무의 잎은 언제 만져봐도 촉감이 좋다. 털설구화는 외국에서 도입한 재배식물이다. 이 나무에는 유성화와 무성화가 함께 피지만, 이를 개량한 설구화는 눈덩이 모양의 무성화만 피운다. 이름과 달리 털설구화보다 설구화의 잎에 털이 더 많다. 여기저기 있는 감나무와 모과나무는 친근한 마을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제격이다. 향기가 고운 모과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탐스럽다.

과거 다른 시기에 조림목으로 심은 리기다소나무와 왕벚나무는 이미 절정기를 지나 여생을 보내듯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김구 묘역 부근의 잣나무 종류는 아직 충분히 크지 못해 몇 년 뒤가 더 궁금하다.

풀은 일부러 심지 않아도 갈수록 다양해진다. 대략 나무 종류의 서너 배는 된다. 더울수록 많아지는 털별꽃아재비, 환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석잠풀, 항상 든든하게 땅을 지키는 맥문동의 꽃이 한창이다. 여기저기서 직박구리, 참새, 딱새 등이 다른 음색과 박자로 노래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행복해진다.

오래된 숲은 영혼을 사로잡는 깊은 맛이 있다. 나무 끝을 올려다보면 파란 하늘을 향하는 나무들의 의지와 운명이 예술작품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숲은 당당하게 뿜어내는 에너지가 좋고, 새로 형성되는 숲은 싱그러워서 마음을 사로잡는다. 효창숲은 그렇게 크진 않지만 숲의 여러 모습을 두루 보여준다.

김지석 나무의사·언론인 jisuktree@naver.com

사진 강기원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