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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평화·민주·인권’…“기다리지만 말고 찾아가세요”

8·15 특집-평화·민주·인권을 향한 작은 박물관 스탬프 투어 (하)
이한열기념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박종철센터, 식민지역사박물관

등록 : 2024-08-08 15:09 수정 : 2024-08-15 21:05
지난 6월25일 용산구 청파동에 위치한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오른쪽)이 스탬프투어 첫 완주자 분께 기념품을 전하고 있다. 평화·민주·인권을 향한 작은 박물관들은 8개 박물관을 완주한 이들에게 기념품을 주고 있다. 스탬프투어 참가는 구글링크(https://forms.gle/7W1hXyMF9mYDXKJo7)를 통해 하면 된다.

이한열기념관 ‘행동하는 양심’ 되고자 했던 한 청년의 마음 느껴져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위안부 할머니 절규, 희망으로 바뀌길

박종철센터
마음 따뜻한 청년, 6월항쟁 도화선 돼

식민지역사박물관
‘친일 가문-독립운동 가문’ 소개 인상적


지난주에 이어 평화·민주·인권을 향한 작은 박물관 스탬프 투어 두 번째 여정을 다녀왔다. 이한열기념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박종철센터,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돌아봤다. 작은박물관투어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시민들은 구글링크(https://forms.gle/7W1hXyMF9mYDXKJo7)를 통해 신청하면 된다. 권력으로 인권을 유린하고, 독재로 민주를 탄압하고, 전쟁으로 평화를 짓밟을 때 사람들은 평화와 민주와 인권을 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희망으로 묶인 8개의 작은 박물관 스탬프 투어를 하는 동안 엄마 아빠와 함께 박물관을 찾은 아이들을 보았다. 과제를 하는 듯 박물관 전시물들을 보고 또 보며 적고 읽었다. 시간 들여 천천히 전시장을 둘러보는 외국인들도 보았다. 아는 것보다 몰랐던 사실이 많았고, 잊힌 기억을 되찾기도 했다. 8개의 작은 박물관은 그렇게 사람들과 같이 숨 쉬고 있었다.

이한열기념관 전시실 모습(아래 사진은 이한열기념관)

이한열기념관

‘안녕하세요 한열이 형. 민주주의 운동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시위를 한 모습을 보며 마음 한쪽에서 뭉클함이 느껴지네요. 한열이 형의 죽음으로 움츠려들던 민주주의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서 우리나라가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됐어요. 한열이형 정말 고마워요.’

이한열기념관을 돌아본 한 초등학생 아이의 감상글이다. 아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이한열의 삶, 이한열기념관을 돌아봤다.

1986년 2월 연세대학교 신입생이 된 이한열은 동아리 ‘민족주의 연구회’ ‘만화사랑’ 활동을 통해 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졌으며, 경영학과 동기들은 강하고 성실한 친구로 기억했다는 설명으로 기획전 ‘이한열, 나의 친구’는 시작된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부끄러움 없이 살아야 한다’는 말을 즐겨 했다는 이한열. 1987년 1학기까지 등록된 그의 학생증과 문무대에 입소해서 병영생활수첩에 작성한 그의 일기가 전시됐다. (당시 남자 대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 문무대라는 곳에 가서 군사훈련교육을 받아야 했다.) 만화사랑 동아리에서 그린 그림에는 ‘민주를 외치는 마음은 결코 서러워서는 안 된다 … 외로워서도 안 된다’는 내용의 글이 적혔다.

상설전시실에는 1987년 6월9일 그가 최루탄에 쓰러질 때 입고 있던 옷과 운동화가 전시됐다. 최루탄 피격 직전 연세대 정문 앞에서 시위 중인 이한열의 모습과 피격 직후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있다. 6월10일부터 시작된 민주항쟁은 6월 내내 이어졌고 6·29민주화선언을 이끌어냈다. 1987년 7월5일 세상을 떠난 이한열은 이 땅에 민주주의의 새 길을 열고 서럽지도, 외롭지도 않게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졌다.

이한열이 1984년 1월 고등학생 때 부모님께 보낸 편지와 1985년 어머니가 이한열에게 쓴 편지가 나란히 걸려 있다. 가족들을 따듯하게 챙기는 착한 아들, 아들에 대한 염려와 사랑이 담긴 어머니의 편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지하전시실로 가는 길. 골목 한쪽 벽에 줄지어 끌려가는 소녀들의 모습이 그려졌고, 맞은편 벽에는 괴로운 얼굴로 그것을 보는 할머니들의 얼굴과 손 부조상이 설치됐다(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담장).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겪었던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하며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공간이며 전쟁과 여성폭력 없는 세상을 위해 연대하는 박물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맞이방’에서 표를 구입한 뒤 안내에 따라 건물 외부로 나가서 지하로 가는 좁은 길을 걷는 것에서부터 관람은 시작된다. 군홧발소리 등 전쟁을 상징하는 소리에 마음이 불안해진다. 골목 한쪽 벽에 줄지어 끌려가는 소녀들의 모습이 그려졌고, 맞은편 벽에는 괴로운 얼굴로 그것을 보는 할머니들의 손과 얼굴 부조상이 설치됐다.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지하 전시관에 들어서면 ‘맞이방’에서 표를 사고 받은 카드에 소개된 할머니를 영상으로 만난다. 1층을 올라가는 계단 벽 벽돌에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새겨져 있다.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거예요.’ ‘우리에게 일어난 그 진실은 우리가 죽는다고 묻히는 게 아닙니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집니다.’ ‘온 세계 사람들이 우리가 겪은 일을 다 알았으면 좋겠어.’ ‘우리의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계단을 오르며 벽돌에 새겨진 문구가 절규에서 희망으로 바뀌는 걸 본다.

2층 전시실에서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생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로 살았던 고 김복동 할머니의 전시가 열린다. 이와 함께 ‘일본군 ‘위안부’-전쟁이 낳고 키운 기형적 제도’라는 주제의 전시물을 통해 당시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건립, 국제사회와의 연대 등의 활동도 소개한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오면 지금도 세계에서 계속되고 있는 전쟁과 여성폭력, 인권유린을 고발하고 그에 맞서는 국제 사회의 연대 이야기도 볼 수 있다.

박종철센터 벽에 그려진 박종철 벽화(박종철센터 작은공원)

박종철센터

박종철센터 앞 골목을 사람들은 박종철 거리라고 부른다. 그 골목 어디쯤에 박종철의 하숙집이 있었다. 겨울 저녁 누군가는 그 길을 함께 걸어와서 박종철의 하숙집 앞에서 ‘잘 들어가’ ‘내일 보자’는 인사를 나누었을 것이다. 겨울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누군가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짓는 벽화가 박종철 센터 건물에 그려졌다.

박종철 상이 있는 작은 공원으로 들어섰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재학중 치안 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 6·10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됨’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기념비를 보았다.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사상과 신념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의자, 박종철 상을 뒤로하고 전시실로 올라갔다.

동네 귀염둥이로 자라고, 찬 도시락 먹는 친구들과 자신의 따듯한 도시락을 나눠 먹을 줄 알았던 고등학생 박종철. 대학생이 된 박종철은 1985년 공장 활동을 했다. 당시 쓴 일기에 ‘일당 3천5백원, 노동자 6명, 작업장 내의 조명, 환기, 위생 시설은 거의 0점에 가까울 정도다’라는 글을 남겼다.

‘박종철, 시대와 마주하다’라는 제목의 글에는 “1980년부터 1983년은 사복경찰이 학교에 상주하며 학생들을 감시했다. 1984년 학원자율화 조치로 경찰이 학교에서 철수 했지만 교문 앞에서 학생들을 감시하고 검문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혔다. 박종철은 1986년 노동현실을 고발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돼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출소했다.

1986년 7월15일 재판정에서 박종철은 “내가 왜 당신들 앞에서 재판을 받아야 합니까? 80년 5월 광주에서 죄 없는 시민들을 학살하고 권력을 잡은 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재판을 하려면 그 학살자들을 잡아들여 재판하십시오”라는 진술을 했다고 한다.

1987년 1월13일 밤 연행된 박종철은 고문을 당해 죽었다. 그의 죽음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불을 지폈다.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경복궁을 침략하는 일본 군대 그림(식민지역사박물관 건물).

식민지역사박물관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전시물들은 일제의 제국주의 야욕을 말한다. 그 첫 전시물은 ‘경복궁을 침략하는 일본 군대’ 그림이었다. 1894년 7월23일 일본 군대는 경복궁을 무력으로 침략했다. 동학농민혁명이 빌미였으나, 동학농민군은 그 이전에 이미 조선 정부와 화약을 맺고 해산한 상태였다. 조선 정부의 철병 요구를 묵살한 일제는 경복궁은 물론, 서울 일대의 핵심 지역을 점령했다. 일본이 청나라에 개전 선언을 한 날은 같은 해 8월1일이었다.

두 번째는 1911년 일본 교토 히노데신문사에서 신년부록으로 만들어 배포한 조선쌍륙(주사위를 굴려 목표지점에 먼저 도착하면 이기는 놀이)이다. 놀이판 그림에 데라우치, 이토 히로부미,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일본의 주요 인물과 삼한, 신라, 가야, 백제, 고구려까지 정벌했다고 일제가 주장하는 설화에 나오는 ‘진구황후’(신공황후)도 있다. 조선의 역사와 민속을 왜곡하는 그림도 그려졌다. 이는 1910년 일제의 강제적인 한일합방을 일본인들에게 주입하기 위한 것이다. 일제의 식민사관이 그 이전부터 완성됐다는 것을 알려주는 증거다.

전시된 장행기(지원별 출정 깃발)가 세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강제로 일제의 군대로 끌려가는 우리나라 청년들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행기가 상여가 나갈 때 함께 가는 만장 같다고 해서 ‘청춘만장’이라고 불렀다.

장행기가 전시된 곳을 지나면 일제강점기 친일 가문과 독립운동 가문을 소개하는 공간이 나온다. 마지막 공간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만행을 책임지지 않는 국가에 맞선 시민사회의 노력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친일 잔재 청산의 출발을 알리는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소개가 이어진다.

1 평화·민주·인권을 향한 작은 박물관들 제공 2~5 장태동 여행작가

글·사진 장태동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