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숲길 걷기
서울 숲 중 수종 가장 다양…“풍성함·세련미 함께 갖춰”
김지석의 숲길 걷기 ⑦ 남산 숲길과 야외식물원
등록 : 2024-08-15 16:10 수정 : 2024-08-15 16:13
혼잡한 길 바로 옆에 펼쳐지는 별세계
나무·동물·하늘의 수많은 사연 얽히고
매미 소리 시끄러워 “깊은 숲” 온 듯 하지만
기후변화로 소나무 줄어들어 안타까워
남산은 수도 서울의 중심이다. 다행스럽게도 숲길 걷기 코스로도 훌륭하다. 다양한 모습의 숲은 바로 옆 혼잡한 거리에만 다니는 사람은 알 수 없는 별세계와 같다.
6호선 버티고개역 3번 출구로 나온다. 남산으로 들어가는 일고여덟 곳의 출발점 가운데, 호젓하면서도 숲에서 가까운 곳이다. 똑바로 이삼 분 가서 계단을 올라 생태다리를 건넌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면, 과거 봇짐을 지고 버티고개를 넘어 한강으로 향하던 선조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숲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나무와 땅과 하늘과 동물은 사람 세상 못잖은 사연으로 얽혀 있다. 도시의 숲에는 사람도 깊숙이 개입해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무난한 식생과 풍광 속에 아까시나무가 두드러진다. ‘아’ 소리가 날 정도로 많은 ‘까시’(가시)는 눈과 잎과 어린 가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밝은 녹색 잎을 단 젊은 나무도 적지 않지만, 키 큰 나무는 대개 노쇠해 가지가 검게 변하고 있다. 아까시나무는 산업화 시대의 대표적인 조림목이다. 거친 땅에서 잘 자라는 것은 물론이고, 질소를 고정해 땅을 비옥하게 하고 많은 꽃을 피워 양봉에 크게 기여했다. 이 나무가 이제 죽어간다. 다른 나무가 들어서도록 숲을 ‘민주화’한 뒤 묵묵히 퇴장하는 모습이다. 나이 든 아까시나무를 보면 따듯하게 박수를 쳐줄 일이다.
과거 한양도성 자리에 설치한 데크길을 건넌다. 오른쪽 운동시설의 고함소리가 거슬리지만, 한강 쪽으로는 숲이 깊게 펼쳐져 있다. 찻길 사이에서도 씩씩하게 자라줘서 고맙다. 호텔 옆길을 지나 길을 건너고 국립극장 옆을지나 갈림길에서 좌회전한다. 100m쯤 가서 왼쪽에 숲길 입구가 나타난다.
초입에 키 큰 백목련과 팥배나무가 환영하는 모습으로 서 있다. 백목련은 외국에서 들어왔으나 팥배나무는 자생종이다. 훤칠한 키에 배꽃을 닮은 꽃이 예쁜 나무다. 중부지방에서는 어느 산에서나 크고 작은 군락을 볼 수 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나무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 먹거리가 아쉬운 겨울에 팥알 같은 열매를 가득 달고 동물의 식량창고 구실을 한다. 신기하게도 추울 때 열매의 당도가 올라간다. 동물은 즐겁게 이 나무의 씨를 멀리까지 퍼뜨릴 것이다. 혜택을 받으면 보답하는 게 자연의 생리다.
길가에 산뽕나무의 뿌리가 흙 위로 드러난 곳이 있다. 흔하지 않은 모습이어서 자세히 본다. 산뽕나무는 원래 수피가 누런빛을 띤다. 도시 숲에서는 색깔이 칙칙해지지만 말이다. 뿌리는 순수해서 더 노랗다. 뽕나무의 즐거운 힘을 새삼 실감한다.
숲길 끝부분에 있는 쉼터를 지나 오늘의 본무대인 야외식물원이 시작된다. 아는 만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바로 왼쪽에 대나무 숲이 있다. 대나무는 단아하면서 촘촘하게 자신의 공동체를 만든다. 바깥에서 바라볼 뿐 안으로 들어가기는 어렵다. 대나무 자생지는 원래 따듯한 곳에만 있었다. 이제 중부지방에서도 심어놓으면 무난하게 자라지만, 굵기나 키에서 빈약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대나무는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니어서, 나무 도감에도 풀도감에도 안 나오는 경우가 적잖다. 엄격하게 말하면 풀이다. 단단한 줄기가 겨울에도 살아 있으나 형성층이 없어 부피생장을 하지 못한다. 꼭 담백하고 꼿꼿하게 살려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대나무 숲을 보면 마음을 다잡게 된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라는 애국가 가사처럼 소나무는 남산을 상징한다. 과거에는 더 많았겠지만, 지금은 개체수가 줄어드는 중이다. 기후변화 등의 이유로 소나무의 고난이 커지는 것은 전국이 마찬가지다. 남산의 식물원답게 ‘팔도소나무단지’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개체가 다를 뿐 지역별 차이는 알기 어렵다. ‘솔’이 뜻하듯이 소나무는 으뜸가는 나무다. 어디서나 우리 지형에 잘 적응해 어느나라에서보다 멋있는 모습을 만들어낸다.
소나무는 예로부터 ‘황천에 뿌리를 내리고 청천에 가지를 뻗어 명당의 기둥과 큰 집의 들보가 될 수 있는’ 나무로 여겨졌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연결해 생명의 에너지를 만드는 게 나무인데, 소나무는 그 가운데 가장 위에 있었다. 바위조차 집으로 삼는 굳은 의지와 초연함은 영원을 향하는 꿈과 같다. 게다가 겸허하다. 마음을 비우고 말을 걸면 언제나 친절하게 응답한다.
여름 숲은 도도한 생명력을 과시한다. 그 징표 가운데 하나가 연두색의 싱그러운 새잎이다. 나무는 고정생장하거나 자유생장한다. 한 해 한 마디만 자라는 고정생장 나무에는 소나무, 참나무, 목련, 동백 등이 있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에 잎과 가지의 생장을 멈추고 이후 생식생장에 집중한다. 자유생장하는 나무는 봄에 잎과 가지를 만든 뒤 조건이 되면 다시 잎을 낸다. 새잎은 아기처럼 부드럽고 예쁘다. 여름에 나오는 잎은 하엽이라고 한다. 점잖은 주목과 히어리의 하엽이 탐스러워 미소가 절로 나온다.
한강 쪽을 바라보는 수목원 왼쪽에는 메타세쿼이아와 은행나무가 나란히 마주 보고 서있다. 둘 다 씩씩한 나무여서 압도적인 입체감이 있다. 곧게 올라가는 힘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다. 비탈길에는 서부해당(꽃아그배나무)이 존재감을 과시한다. 키가 크고 뿌리에서 나오는 맹아지가 많다. 이 나무의 세력이 이렇게 강한 곳은 드물다. 봄에는 화려한 꽃잔치를 펼친다.
온 숲에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길게 우는 말매미와 리듬을 타는 참매미가 모두 많다. 약충이 성충으로 바뀌면서 벗고 나간 탈피각이 나무줄기와 잎의 곳곳에 보인다. 약충은 땅속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는데, 무리별로 경쟁을 피하기 위해 소수(1과 자신으로만 나뉘는 수)의 해 동안 머무는 거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자릿수지만 미국에선 11년, 13년에 17년까지 있다. 말매미는 높은 기온을 좋아한다. 그래서 갈수록 더 시끄러워진다. 하지만 도시 숲에서 매미 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그만큼 문제가 있음을 뜻한다. 그 원인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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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이 있는 쉼터와 개울을 지난다. 마주 보는 잎이 해가 지면 접히는 자귀나무, 늘씬한 줄기에 잎 모양도 깔끔한 백합나무, 심장 모양의 잎에 향기까지 고운 계수나무가 멋있게 서 있다. 연못까지 간다. 수련이 한창이다. 연꽃만큼이나 청초한 꽃을 피우고 있다. 줄, 고마리, 개구리밥, 털부처꽃도 잔치에 동참한다.
왼쪽의 언덕길로 돌아온다. 산기슭에 자라는 여러 나무 사이에서 서양오엽딸기(서양산딸기)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 산딸기나무와 비슷하지만 덩굴이 억세고 가시가 많아 동물이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나무다. 이 정도로 넓은 야생 군락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동물의 접근을 막으려고 일부러 심은 건지도 모르겠다.
육교를 지나 하얏트호텔 쪽으로 건너간다. 한강진역으로 내려가는 길도 식생이 괜찮다. 벚나무와 이팝나무, 신갈나무가 반갑다. 나무계단 옆에는 칡이 한창이다. 칡은 과거 어려운 시기를 넘기도록 도와준 구황식물이었다. 양성화가 피지만 흔히 암수로 나누는데, 암칡의 뿌리는 풍성하고 수칡은 가늘다. 잎의 모양으로 구별할 수 있으니 재미있다. 가운데 잎이 넓은 쪽이 대개 암칡이고 좁은 게 수칡이다. 칡은 햇빛을 좋아한다. 번식력이 엄청나 일본에서 미국 남부로 진출한 뒤 생태계를 압도하는 ‘괴물’로 여겨져, 많은 돈을 들여 제거작업을 한다고 한다. 칡은 숲속에서는 잘 자라지 못한다. 햇빛이 강하면 잎을 옆으로 돌려 광합성을 제한하는 지혜도 보여준다. 칡은잘못이 없다. 잘 자라는 게 무슨 죄인가.
남산숲에는 풍성함과 세련미가 함께 있다. 서울의 숲에서 수종이 가장 다양하고 배치도 잘돼 있다. 동네 사람들이 항상 시원하다며 좋아하는 쉼터도 여러 곳 있다. 모름지기 도시 숲은 그래야 한다.
글·사진 김지석 나무의사·언론인 jisuktree@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나무·동물·하늘의 수많은 사연 얽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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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로 소나무 줄어들어 안타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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