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의 시간’을 나눈 할아버지와 손녀…“서로서로 ‘봄’이 되다”

곽병찬 전 한겨레 편집인의 ‘천진의 시간-아이와 백석동천을 걷다’
육아를 씨줄로 삼고 역사와 인문학을 날줄 삼은 69편의 에세이

등록 : 2024-08-15 16:44 수정 : 2024-08-16 08:47

곽병찬 전 한겨레 편집인이 ‘천진의 시간-아이와 백석동천을 걷다’(도서출판 나남)를 펴냈다.

‘향원익청 1·2’(도서출판 길)를 비롯해 ‘우리 역사 속의 사람과자연’ 등 주로 큰 소재로 글을 써온 그가 이번에 잡은 글감은 ‘손녀와 보내는 일상’이다.

하지만 단순한 육아일기는 아니다. ‘아이와 더불어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은 69개의 에세이 속에 그는 50년 넘게 살아온 세검정의 역사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의 철학을 빼곡히 집어넣는다. 육아를 씨줄로 삼고 성장담론·역사·철학·인문학을 날줄 삼아 만들어낸 ‘새로운 장르의 글’이라고나 할까?

신문사 정년을 맞을 즈음 태어난 외손녀 주원이는 그에게 축복이었다. 아이는 그에게 다시 ‘봄’을 느끼게 한다. 주원이 엄마도 키웠지만, 그때와는 또 다르다. 할아버지가 되니 “한걸음 물러서 지긋이 지켜볼 수 있어 유년의 신비를 깊고 넓게 경험할 수 있다”. 할아버지는 “아이를 뒤쫓아가며 그의 눈과 귀와 기억과 직관”을 관찰한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옅어져갔던 할아버지지만 아이가 지닌 “공감과 감수성, 호기심과 명랑, 열린 마음과 관용”에 전염된다. 그러면서 “하나둘 잃어버렸거나 외면한 삶의 보석”을 다시 찾을 힘을 얻는다.

주원이도 “방퉁이, 곰탱이, 방구, 찌찌뽕, 꼬랑내 등 구린 말”을 쓰는 할아버지가 좋다. 할아버지의 구린 말과 행동은 아이에겐 일종의 해방구다. 아이를 처음 키우는 엄마와는 달리 엄마를 키워본 할아버지는 ‘빈틈’을 보일 여유가 있다. 그 빈틈이 아이를 스트레스에서 해방한다.

할아버지는 이런 아이와의 관계를 경험하며 ‘우리’를 다시금 생각한다. “조부모가 떠날 때쯤엔 손주가 커 결혼을” 할 것이다. 개인의 삶은 유장하지만 가족 등 ‘우리’의 삶은 더 유장하다. 자녀를 키울 때는 ‘성장’만을 생각하지만, 손녀를 키울 때는 ‘순환’을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이런 진리를 깨달으면서 아이와 백석동천을 거닌다. 동천은 ‘신선이 살법한 이상향’이다. 할아버지는 생각한다. 아이와 ‘천진의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동천’이라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간 주원이가 할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한다. “할아버지 안경은 저기 두었잖아, 양말은 저기 벗어뒀고! 이제 술 조금만 마시세요.”

할아버지는 주원이가 꼬맹이였을 때 했던 잔소리를 떠올린다. 어느덧 커버린 아이의 모습에, 그리고 되돌려받은 지청구에 할아버지는 ‘지금’ 행복하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