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 고비 넘긴 후 도봉에서 얻은 행복

사람&도봉구 도봉1동 18통 통장 최문수씨

등록 : 2024-10-18 12:28 수정 : 2024-10-18 16:12
최문수 통장은 무수골로 이사온 뒤 지난 20여 년간 주민문화센터에서 배운 ‘서각’ 작품을 마을 곳곳에 붙였다. 그가 그동안 만들어 붙인 서각은 모두 50여 점. 한점 한점에 삶의 희망과 어울림 메시지가 담겨 있다. 소문 듣고 사진 찍으러 오는 방문객도 많다.

큰 병 얻고 도봉에서 인생2막 열어
‘무수골’에서 ‘서각’으로 봉사 20년
“여유 있게 살자 했는데 더 바빠”
“주택 들어서고 젊은이 늘고 좋다”

헐뜯긴 쉬워도 칭찬은 어렵고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도 남에겐 인색한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로부터 칭찬을 한몸에 받는 ‘통장님’이 있다 하니 궁금했다.

지하철 1호선 도봉역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그가 21년째 돌보는 마을 ‘무수골’이 있다. 무수(無愁)골은 말 그대로 ‘근심 걱정 없는 마을’이다. 세종이 아들의 묘를 찾아 왔다가 약수터의 물을 마시고 “물 좋고 풍광 좋은 이곳은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구나” 라고 했다 한다. 마을 안에 도봉초등학교가 있다. ‘아이들은 이런 곳에서 자라야 하는데'란 생각이 스친다.

“학교에 기자재를 납품하는 사업을 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던 2003년 어느 날 대장암 판정을 받고 앞이 캄캄했습니다. 하던 일을 바로 접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살기 위해 매일 도봉산에 올랐고, 다행히 지금은 건강을 되찾았어요. 큰 위기를 겪은 뒤에야 모든 걸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게 됐죠.” 최문수 도봉구 도봉1동 18통장의 인생 2막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가 주민문화센터에서 배운 ‘서각’(글을 나무나 돌에 새겨 만든 작품)은 마을에 사랑을 피우는 씨앗이다. ‘행복한 집’이라는 작품을 선물받아 현관에 걸어둔 주민 김순희씨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와, 행복한 집이네’라며 한마디씩 해요.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죠. 그런 말 있잖아요. 가수들이 자기 노래 가사에 따라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고. 현관을 드나들 때 항상 ‘행복하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해서인지 진짜 행복해진 느낌이에요”라고 했다.

최 통장이 사비를 털어 나무와 재료를 사서 마을 곳곳에 만들어 붙인 서각이 벌써 50개가 넘는다.

이 정도면 도봉1동 18통 전체가 전시관이다. “작품 만들어 내 집 안에만 걸어놓으면 뭐 하나요. 많은 사람과 함께 보고 의미를 나눠야죠.” 도봉구는 이런 노력에 힘을 보탰다. 2019년 이곳을 ‘올해의 아름다운 골목-서각, 화단 특화 조성 골목’으로 지정해 지원했다.

최 통장이 돌보는 도봉1동 18통엔 240여 가구가 산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많이 산다. 길에서 만난 한 주민은 “예전에 그린벨트로 묶였던 지역이라 집과 골목이 많이 낡고 지저분했어요. 그런데 최 통장님이 일을 시작하곤 동네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골목마다 버려진 터는 모두 채소나 꽃을 심고 깨끗하게 청소해 이젠 예쁜 마을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도 많아요”라고 말했다. 이때 누군가 최 통장을 불렀다. “여기 좀 와봐요. 현관 전자도어록이 고장 났나봐. 난 잘 모르잖아.”

길에서 마주치는 주민들은 하나같이 최통장을 보고 활짝 웃는다. 전원일기 양촌리 사람들처럼. “혼자 사는 어르신도 많은데 한분 한분 다 챙기세요. 얼마 전엔 15년 동안 방치돼 있던 마을회관을 사비를 털어 리모델링하셨어요.” 길에서 만난 한 주민의 귀띔이다. 최 통장은 도시생활을 접고 여유 있게 살자는 뜻으로 집 이름을 ‘여유재’라 지었는데 더 바쁘단다.

도봉산 맑은 계곡 물이 흐르는 이 마을 무수천 앞에는 ‘무수울’이란 아담한 한옥카페가 있다. 여기에도 어김없이 최 통장의 서각이 몇 개 걸려 있다. ‘오래 너를 바라보고 싶다’라는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이 카페는 자동차 회사 디자이너로 일하던 고윤수 대표가 무수골의 매력에 푹 빠져 열었다. 고 대표는 “제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내가 와서 살면 되는 거지 누가 뭐 신경 쓰랴'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동네 어르신들은 ‘누가 새로 이사왔으면 인사도 좀 하고 지내야지' 하셨어요. 모든 것이 낯설고 조심스러울 때 최 통장님이 나서서 마을 분들을 한분 한분 소개해주시고 잘 정착하도록 도와주셨어요” 라고 말했다.

최 통장은 할 일이 많다. 이젠 마을이 제법 알려져 새로운 주택이 들어서고 젊은이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이 더 많은 젊은이와 아이들 웃음소리로 가득 차게 하는건 최 통장의 또 다른 바람이다. 오늘도 무수골의 아름다운 변신을 위해 분주한 그의 얼굴엔 행복이 가득했다.

글·사진 이동구 기자 donggu@hani.co.kr

서울앤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