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개의 엘이디 조명과 551개 화분의 띠조명을 밝힌 서울로 7017 모습. 설계자 비니 마스는 서울 도심에 ‘별이 쏟아지는 짙푸른 은하수’를 연출하기 위해 청색 조명을 선택했다. 서울시 제공
길이 멈췄다. 45년을 내달려오던 길은 문득 허공에서 달리는 일을 그만두었다. 오래도록 그 이름은 서울역 고가도로였다. ‘고가’란 토목공화국 일본에서 글자 그대로 들여온 명칭이다.
자본 사회 이래로 길은 내내 속도였고 팽창이었다. 길이 있고 비로소 다른 것들의 존재 양태가 가능했다고 할 만큼 길은 세상과 인심을 규율해왔다. 하물며 표준시라는 개념도 쇠길인 잉글랜드 철도 운행 과정에서 파생했다. 저마다 다른 지역시간으로는 기차를 제때 출발(도착)하게 하기 어려운 터였다. 국가 표준시와 지역시가 공존하는 광경은 영화 <해리포터>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속도를 품고 있는 길은 이처럼 공간이자 거리이고 곧 시간이다.
그 길의 속성을 일터와 일상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살아온 ‘빨리빨리’의 한국인들이 오늘 새로운 길의 장르와 만나고 있다. 비록 숫자를 조합한 건조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서울로 7017’은 처음으로 그 관성을 스스로 내버리고 있다. 이는 속도가 아니라 멈춰선 길이고, 70이라는 개발 시대에 대한 회고가 아니라 그 시대와 길에 관한 성찰이다. 근대 길의 역사 100여년 만에 한국 사회는 고여 있는 길, 퍼내야 하는 길과 맞닥뜨리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상당 부분 주관적 속도로 움직이게 될 이 길은 거대 도로에 붙어살아야만 하는 운명인 도회인들에게 바야흐로 길에 관한 철학이나 사고를 재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요컨대 서울로 7017은 길을 정지시킨 것만으로도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길과도 다른 길이다.
이 길은 어디로 흘러야 하는가? 서울로 7017의 성패는 70이 아니라 17에 달려 있다. 70에 기댄다면 그건 개발사회의 견고한 폐허일 뿐이다. 70은 공사였고 17은 기억을 재구성하는 창조 행위일 수밖에 없다.
센강은 왜 미라보다리 아래를 흐르는가?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가 있어 강물은 기필코 미라보다리를 핥으면서 여태껏 중얼거리고 있다. ‘미라보다리 아래 센강이 흐른다/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흘러간다.’ 중국 쑤저우의 좁고 탁한 물 위에 걸려 있는 풍교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에 세번 낙방한 장계가 낙향하면서 쓴 ‘풍교야박’이 아니라면 한낱 작은 돌다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두 줄기로 관류하는 프레겔강과 섬을 잇는 쾨니히스베르크 일곱 다리라고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일곱개 다리를 한번씩만 건넌 뒤 출발 지점으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알고자 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개념화해서 도해한 게 외눈박이 수학자 오일러다.(1735. 오일러 그래프/한 붓 그리기) 여기서 오늘날 메트로 노선지도가 나왔다. 17개의 길이자 다리이자 골목인 서울로 7017은 몇번을 거쳐야 애초의 자리로 귀환할 수 있을까? 그 일곱 다리처럼 이를 논증하는 놀이로 길을 시작해보는 것도 유쾌한 일이다.
이야기가 없다면 서울로 7017은 커다란 화분이 거듭 놓인 70만 남게 될 터이다. 도시재생이란 시계를 고쳐서 다시 가게 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수리하는 일이다. 17이 기억의 재창조와 생성소, 나아가 성소에 이르러야 고향 잃은 도회인의 귀소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서울이 여기로 모이고 다시 흩어지게 하려면 17개의 샘솟는 시와 노래, 역사와 인물, 일상과 사사로움이 이 길 안팎에 두루 살게 해야 한다. 그때 한국인의 길은 17갈래로 새로 뻗어나가고 또 깊어지리라.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