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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타운은 100m 달리기, 지역재생은 마라톤”

가리봉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 통과 이끌어낸 배웅규 교수

등록 : 2017-05-25 14:31
서울시의 가리봉 도시재생사업 총괄계획가인 배웅규 교수가 지난 11일 가리봉 거리에서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 19일 도시계획위원회를 열어 구로구 가리봉동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을 원안 가결했다. 뉴타운 사업이 10년 넘게 표류하면서 도심 속 섬으로 남은 가리봉에 5년 동안 마중물 사업비 100억원(서울시 50억원, 국비 50억원)을 투입해 이곳 도시재생을 본격화한다. 중앙부처, 지방자치단체 등과 연계 사업으로 291억원이 추가로 들어간다.

2014년 9월 서울시로부터 ‘가리봉 도시재생사업 총괄계획가’로 위촉된 배웅규(중앙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2년6개월 동안 주민과 만나 의견을 모은 끝에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 통과를 이끌어냈다. 그는 “가리봉 거리에서 만나는 주민의 80%가 외국인이고, 그중 90%가 중국동포”라며 “묵은 주민 갈등을 해소하고 새로 자리 잡은 중국동포와 함께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중국동포가 가리봉에 특별히 많은 이유는?

“일단 저렴한 숙소가 많다. 가리봉에는 1970~80년대 구로공단 여공의 숙소로 지어진 ‘벌집’이 아직도 남아 있다. 5~6.5㎡(약 1평 반~2평) 쪽방이 다닥다닥 붙은 건물이다. 지금은 가리봉 인구가 2만명이 채 안 되는데, 1980년대 구로공단이 한창일 때는 5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단독주택을 쪼개는 식으로 개조했는데 돈이 되니까 지금의 고시원처럼 아예 새집을 지은 게 벌집이다. 40가구가 넘는 벌집도 있다. 판자촌, 초가집이 있었던 그때 눈으로 보면 아파트다. 그런데 경제가 성장하면서 공장이 지방으로, 외국으로 빠져나갔고 빈방을 중국동포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여공이 빠져나간 자리를 중국동포가 채운 것이다.”

중국동포와 주민 사이에 갈등은 없었나?

“처음에 중국인이 막 들어오니까 주민들이 많이 당황했다. 문화적 차이가 컸다. 중국에서는 쓰레기봉투가 따로 없고 까만 봉지에 쓰레기를 담아 집 앞에 놓아두면 치워가는 식이라, 초기에 쓰레기 처리 문제로 말썽이 많았다. 여러 사건·사고까지 더해져 가리봉이 위험한 동네로 알려졌는데, 지금은 강력범죄도 거의 없고 많이 달라졌다. 가리봉에 사는 내국인 중에는 연세 많은 건물주가 많다. 건물이 허름해서 내국인 세입자는 ‘집이 춥다’ ‘이것 고쳐 달라’ ‘저것 고쳐 달라' 요구가 많은데, 중국동포는 불만이 적고 월세도 꼬박꼬박 잘 내서 집주인 편에서는 편하다고 한다.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져 이제는 공생하자는 움직임이 있다.”

뉴타운 사업 때 주민끼리 갈등도 심각했다는데.

“지역이 계속 쇠퇴하니까 2003년부터 서울시에서 뉴타운 사업을 추진했다. 그런데 월세 수입이 많은 건물을 가진 일부 주민은 손해니까 반대했다. 찬성과 반대로 나뉜 주민이 엄청난 갈등을 빚었다. 건축 행위가 금지된 채 10년 이상 묶여 있다 보니 노후화는 더 가속화됐다. 2014년 말 뉴타운 지구 해제 이후 비전을 설계하면서 1단계로 ‘치유’ 단계를 넣었다. 일반적인 계획에는 없는 단계다. 주민 갈등이 그만큼 컸기 때문에 신뢰 회복과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2015년 초부터 주민설명회를 열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 주민들이 호통치고, 삿대질하고, 지역 국회의원도 면박을 당했다. 찬성파와 반대파 모두 불만이 쌓여 있었다. 주민설명회가 끝난 뒤 형사가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어떤 식으로 돌파구를 마련했나?

“그때 가장 잘한 일이 도시재생지원센터를 마을공원에 설치한 것이다. 가리봉에는 녹지가 거의 없어서 1990년대에 작은 마을공원을 2곳 만들었는데, 싸움 같은 말썽이 자주 벌어져 폐쇄된 상태였다. 평범한 사무실을 임대할 수도 있었지만, 도시재생사업이니만큼 2015년 2월 마을공원에 컨테이너를 놓고 도시재생지원센터를 열었다. 집기도 구로구청 창고에 있던, 안 쓰는 물건들을 가져왔다. 닫힌 마을공원이 열리자 주민들이 좋아했다. 장기를 엄청 좋아하는 중국동포들은 장기를 두려고 마을공원으로 모여들었다.”

이번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의 핵심은 무엇인가?

“활성화 계획을 만들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구로공단의 배후 중심지였던 가리봉이 지금은 고립된 섬이 돼버렸다. 심지어 인근 지밸리 종사자들은 여기(가리봉동)가 있는지도 모른다. 지밸리 종사자 16만명 가운데 4%만 이 지역에 살고 나머지 96%는 외부에서 출퇴근한다. 그래서 ‘지밸리와 가리봉의 관계를 회복하자’는 비전을 세웠다. 또 가리봉 어느 동네에 가도 첫째 요구가 ‘길 넓혀달라’, 둘째가 ‘집 고쳐달라’는 건데, 국토교통부 가이드라인으로는 길도 안 되고 집도 안 된다. 그래서 필지 2곳을 사서 주민들이 주차장 협동조합을 만들어 운영하고, 길이 좁아서 소방차가 들어올 수 없는 문제는 비상 소화시설을 15곳에 설치하는 식으로 반영했다.”

지금 서울시의 도시재생사업은 예전과 어떻게 다른가?

“과거의 도시정비는 노후 주택 재개발과 기반시설 정비에 집중하는 물리적 정비였다. 지금은 사회적 재생과 경제적 재생이 더 중요하다. 공동체 활동과 사회적 경제를 통해 주민이 함께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찬성 주민도 반대 주민도 중국동포도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게 가장 큰 성과다. 내가 주민들한테 지역재생사업을 설명할 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뉴타운사업은 100m 달리기였다. 출발선에 주민대표 몇명 세워놓고 ‘땅’ 울리면 10초 안에 결론이 나야 하는 사업이었지만, 주민은 구경꾼이었다. 반면 지역재생사업은 마라톤이다. 주민 모두가 출발선에 선다. 모두가 완주하는 게 목표고, 완주하는 모든 주민이 승리자다.”

글·사진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