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을 넘기면서 부쩍 자신이 없어졌다는 한 여성의 사연을 들었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부인으로, 부모님의 딸로, 또 주변의 사랑받는 친구로 열심히 살아왔는데, 정작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 속상하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가는데,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부쩍 조바심이 나서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어른이 됩니다. 서른을 넘기고 마흔을 맞으며 50이라는 낯선 숫자와 맞닥뜨립니다. 정말이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무심한 숫자 앞에서 담대해질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슬럼프와 고비가 찾아오는데, 나이는 괴물처럼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괴력으로 내 앞에 우뚝 버티고 서 있습니다. 낯설기 때문에 생경하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더욱 당황스럽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성인들은 별다른 준비 없이 어른이 됩니다. 한 사람의 배우자가 되는 법과 함께 지내는 연습을 해보지도 않고 결혼식을 올리고 삽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아빠,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인지 별다른 학습도 없이 한 생명체의 엄마와 아빠가 됩니다. 한 가정의 사위와 며느리가 어떤 것인지 진지한 고민 없이 새로운 가정의 구성원이 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생은 역할과 관계 맺기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대부분 진지한 연습 없이 반려자가 되고 부모가 되고 사위와 며느리도 됩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에 선행학습과 예습, 복습을 하는 우리 사회지만, 정작 중요한 ‘관계 맺기’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별다른 준비가 없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거나 회사에 입사하면 오리엔테이션이라는 것이 있어 주변에 익숙해지고 업무를 준비하는 시간을 주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가정생활에는 그런 것들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준비도 없이 연습도 하지 않은 채 우리는 어른이 된 거죠. 아무리 선한 사람들이라도 함께 살게 된다면 불가피하게 불편함과 이견, 갈등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 공존하는 법, 갈등을 푸는 법에 대한 준비는커녕 대부분 ‘어떻게 될 거야’라는 막연한 믿음만으로 지냅니다.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남들이 모르는 많은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 안에 너무나 많은 ‘나’를 담고 삽니다. 사연을 주신 분처럼 직장의 구성원으로, 배우자로서, 부모로, 또 아들과 딸로 인정받아야 할 게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까닭에 두 어깨는 늘 무겁습니다. 다른 구성원을 위해 역할에 충실하다 보니 늘 조연이었고,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별로 신경 쓴 적이 없습니다. 자기를 존중하는 습관을 잃어버리다 보니 어느 날 자존감이 떨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나는 누구일까? 좋은 엄마? 멋진 아내? 능력 있는 직장인? 듬직한 딸? 사랑스러운 며느리? 도대체 어떤 모습이 진정한 나의 얼굴일까?”
아마도 제게 사연을 주신 분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답답하시겠지만, 제게는 건강한 질문으로 들렸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그런 질문조차 회피하면서 살고 있으니까요. ‘나’의 용도와 가치, 더 나아가 정체성(아이덴티티)에 대한 질문이 해답을 찾기 위한 진정한 첫걸음입니다.
그런데 가만 따져보면 많은 분들의 고민과 문제는 정작 나이에 있지 않습니다. 날마다 쳇바퀴 돌 듯하는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으로 풀이되기도 합니다. 설렘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아니라 성장을 멈춘 게 진짜 문제인 듯싶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직장을 위해, 현실에 오랫동안 치여서 한자리에 너무도 오랫동안 머문 결과입니다. 집안의 성장, 아이들의 성장뿐 아니라 나 역시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내 삶은 여기까지야’라고 스스로 규정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시선을 남들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두기를 권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 파악하는 시간부터 가져보세요.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만 급해서 남들이 하는 일을 따라 할 뿐, 자기에게 진정 무엇이 간절한지 알지 못합니다. 라틴어 격언 가운데 ‘에스토 쿼드 에스’(Esto quad es)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자신다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당신이 빛나는 순간은 온전히 자기 자신일 때이지 누구와 비교하거나 흉내를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도 밀레니엄 특집에서 지난 천년 동안의 가장 위대한 발견으로 ‘나의 발견’을 꼽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안다는 것은 그토록 위대한 작업입니다.
무료하다면, 삶이 의기소침해졌다면 우선 가방부터 바꿔보세요. 오해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명품 가방이 아니라, 그 가방에 들어가는 내용물을 말합니다. 가방에 계약서와 영양제만 넣어 다니는 사람은 매력이 없습니다. 가방에 꿈을 넣어 다니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납니다. 성장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고 그 내면에는 설렘이 있는 까닭입니다. 성장한다고 해서 무슨 자격증 취득 같은 것으로만 제한해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생활의 도구가 되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만, 더 의미가 있는 것은 내 영혼의 성장을 돕는 성장입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5년 뒤, 10년 뒤 나의 미래와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을 겁니다.
저도 오늘 가방을 챙겨 떠납니다. 5년 뒤, 10년 뒤를 위한 조용한 준비입니다. 그 가방은 단순한 여행 용품을 채운 도구가 아니라 저를 성장시켜줄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가득 채워올 겁니다. 제게 가방은 꿈이고 활력입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글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 저서 <투아레그 직장인 학교> 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