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우리에게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디디피)를 남기고 2년 뒤인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누구도 넘보기 힘든 독특한 조형 세계를 탐하던 건축가였고, 실현된 프로젝트도 없이 종이 위에 현실성 부족한 디자인만 남기는 ‘페이퍼 아키텍트’로 오랜 시간을 지내다 늦게서야 작품들을 쏟아냈다(완공된 첫 작품으로 알려진 소방서도 쓸모가 부실해 지금은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을 정도니…).
공모전을 통해 선정되었던 그의 디디피 설계안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누가 보아도 주변 환경과는 동떨어진, 도시의 역사나 문화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디자인으로 보였고 졸속 행정에 대한 의견도 많았다. 그리고 이제 3년이 흘렀고 그때 일었던 소란은 아직도 온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디디피는 환유된 풍경?
하디드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환유된 풍경’(Metonymic Landscape)이라 설명한다. 정확한 표현이고 뛰어난 통찰력이다. 디디피의 실체를 이보다 더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환유’는 어떤 대상의 실체가 아닌 캐리커처 이미지쯤으로 이해되는 단어다. ‘벼락 맞을’은 ‘벌 받을’의 환유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은 환유를 욕망의 메커니즘으로 보았다. 욕망은 잡았다고 생각하면 이미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신기루와 같고, 인간은 미끄러진 욕망을 쫓으며 삶을 지속한다고. 프로이트는 죽음만이 욕망을 충족시킨다 했던가? 말하자면 동대문 운동장의 자리에 실제 풍경이 아닌 욕망의 대상인 신기루를 들여앉혔다는 얘기다. 어쩌면 이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사람들이 바라던 정답이 그런 것은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 디디피를 ‘환유의 풍경’이라며 그리도 공허한 광고를 계속하는 것 아니겠는가?
정확한 용도가 모호한 디자인플라자
문화와 역사, 예술을 총망라하는 이런저런 이름들을 전전하다 겨우 정착한 ‘디자인플라자’라는 어정쩡한 명칭이 말해주듯, 이 건물은 전시시설인지, 상업시설인지, 요식업장 아니면 유적 박물관인지 명확하지 않다. 뭐든 하나는 얻어걸리길 바라며 잡히는 대로 상자에 넣어 포장한 종합선물세트다. ‘지어놓기만 하면 그 사람이 온다'는 계시에 생계 터전인 옥수수밭을 밀어버리고 야구장으로 만들어버린 영화 <꿈의 구장>(1989)의 몽상에 젖은 농부 캐빈 코스트너가 떠오른다.
그들은 별 볼 일 없던 스페인 지방도시에 스타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미술관을 유치해, 하루아침에 세계의 이목을 끄는 일급 관광도시로 떠오른 ‘빌바오 효과’를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성공이 단지 구겐하임 미술관 하나 때문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빌바오는 오래전부터 기본 설계(마스터플랜)를 마련해 수로를 다듬고 거리 환경을 개선하고 경전철을 놓으며 도시를 다져왔고, 미술관은 그 계획의 일부였다. 사람들을 불러모은 희한하게 생긴 미술관의 몫도 작지는 않았으나, 방문객들이 머물고 다시 찾는 것은 더 좋아진 도시 환경 덕임을 알아야 한다.
생각해보라. 올림픽을 맞은 베이징도 유명 건축가들을 불러들여 놀라운 건축물 퍼레이드를 펼치며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프로그램에 대한 면밀한 검토도 없이 지은 행사용 건축들은 폐막식의 불꽃이 꺼지자 금세 도시 문화적 영양실조 증세를 드러냈다. 기념비적 건축물의 화려한 외양과 양적 공급은 아무도 찾지 않는 전시용 풍경으로 남았고, 해마다 시설의 유지관리비로 엄청난 세수만 대책 없이 쏟아붓고 있다.
매끄럽고 세련된 내부의 공간 디테일
이 자리의 전 주인이었던 동대문운동장 역시 일상으로 분주한 주변에 녹아들지 못한 생뚱맞은 건물이었고 적절치 못한 장소에 지어진 놀이터였다. 그런 이질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디디피가 동대문운동장의 도시적 맥락을 오롯이 이어받았다는 역설적 이해도 할 수 있다.
멀리서 보면 흥미로우나 가까이에선 끔찍하게 메마른 롯데타워와는 반대로, 디디피는 길 건너 먼발치서 보면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아이들 장난감 액체괴물마냥 기괴하지만 곁으로 다가서면 놀라운 공간적 경험을 제공한다.
유동적인 형태를 따라 흐르듯 오르고 내리며 건물 덩이들과 그 사이의 빈 여백이 만들어내는 공간감과 리듬감은 압권이다. 동일한 목표를 보며 클라이맥스를 향해 일제히 노래하는 건물의 구성체들은 오랫동안 연마한 기예단원들의 공연과 같이 매끄럽고 세련됐다. 보행자와 함께 걷는 형태와 공간, 덩치에 대한 부담을 줄인 디테일들은, 현실성이 결여된 하디드를 원하는 건축주들에게 향하던 손가락을 오므리게 만든다. 이런저런 이유로 디디피에 발톱을 세우던 우리나라 건축가들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성적표를 떠올리게 하는 반성의 시간도 함께 선사한다.
일단 디디피의 영역 내로 들어서면 외부의 실제 생활은 다 잊는 최면에 걸린다. 어차피 실체가 아닌 도심 속 오아시스의 그림자를 꿈꾼 건물이니 현실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렇다 해도 이 건물에서 무언가 기능을 염두에 두고 조성된 공간은 정말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좋게 말하면 근사한 개념의 눈부신 조형적 실현이고, 나쁘게 말하면 너무 빛이 좋아 시고 떫어도 먹게 되고 마는 개살구다.
하지만 현실적 일상의 터가 되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밝힌 적도 없으니, 문화의 흔적을 누리려는 방문객의 셀카 배경으로도 적당하고 관광 흥행에도 해될 것 없는 꿈의 세트다.
건물 내부는 외부보다 공간적 질도, 설득력도 떨어지고 쓸모도 부족하다. 화장실이 어딘지, 저기는 뭐 하는 곳인지, 길눈 어두운 사람 헤매기 딱 좋으나, 너무 걱정 마시라. 계속 한 방향으로 돌다 보면 출발했던 자리로는 어찌어찌 돌아오게 되니.
공공시설의 실패는 운영과 관리 문제가 흔해
중요한 역사적 유물과 장소 보존 문제의 우려가 컸지만 콩쥐 대하는 팥쥐 엄마마냥 구석에 박아두고 생색만 낸다. 입성도 먹성도 부실해 보이는데 그 엄마는 입만 열면 문화를 들먹인다. 공공시설의 실패는 건축물 자체의 문제일 때도 있지만 운영과 관리가 문제인 경우가 더 흔하다.
연전에 디디피 외부에서 건축 전공 학생들의 전시가 있었다. 전시 담당자들은 만만한 학생들에게 건물과 안 어울린다며 함부로 작품을 재단하고 수정을 강요했고 심지어 아예 다시 디자인하게도 했다. 전시를 눈앞에 둔 학생들은 무기력하게 그들의 뜻을 따르며 밤을 새웠지만 마음으로 수긍하지는 않았고, 소리 내 항의하지 못했지만 분노하고 있었다. 공공시설이란 공공의 입장이 가능하다는 뜻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관리자들이 명심해야 시민들도 그리 느낄 것이다. 스스로 문화적 편의점의 갑질 점장 자리가 아닌 진정한 디자인 한국의 일익을 담당하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수많은 기억이 묻힌 이 자리에는, 바쁘게 땀 흘리는 시민의 삶에는, 화려한 제스처의 환유적 풍경도 그럴싸하나, 걷기도 쉬기도 할 실제 풍경과 녹색 조경이 더 귀하다. 우러러 감탄할 작품으로서의 건축은 근사하지만, 실제 쓸모에 따라 제대로 쓰이고 규모 있게 관리되는 삶의 터전이 필요하다. 유혹적 자태를 뽐내는 도시적 포르노그래피에 넋을 잃지만, 이웃과 어깨를 겯고 함께 도시를 만들어가는 일상에 맞는 자세와 복장을 갖춘 건축물도 절실하다.
어차피 우리 앞에 한 상 크게 차려진 서커스이니 신명 나게 즐겨보자. 하지만 매혹적인 형태와 공간감에 도낏자루 썩지 않도록 연신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 차리고, 내 몸 치장만 말고 주변도 쓸고 닦아 한번 온 손님들 계속 찾게 만들자. 무엇보다, 허울도 좋지만 내실은 무거워야 한다는 채찍도 잊지 말자. 눈도 호강하고 마음도 즐겁지만, 이런 잔치 또 벌이진 말았으면 좋겠다. 생일 하루 잘 먹자고 다른 여러 날을 굶을 수는 없지 않은가?
글·사진 안준석 공학박사·건축가(AIA),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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