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가족의 생활 터전인 빵집에서 모처럼 가족이 모두 모여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빵집을 물려받기 위해 맹수련 중인 아들 종혁씨, 동부고려제과 주인 서정복씨, 부인 안병연씨, 박사과정 중인 큰딸 슬아씨, 친척 형수 김순분씨가 환하게 웃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문화유산’이 된 동네 빵집
서울 동쪽 끝 중랑구에는 전체 ‘서울시 미래유산’(시민생활 분야) 135곳 중 딱 2곳이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하나는 묘지이고, 하나는 빵집이다. 1933년 처음 조성된 망우공원묘역(옛 서울시립 망우리 공동묘지)은 한용운, 이중섭 등과 같은 근현대 독립운동가와 예술가들이 묻혀 있어 문화탐방 코스로도 인기가 높은 명소다. 반면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동부고려제과’라는 동네 빵집은 낯설다. 타 지역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74년 처음 문을 연 뒤 줄곧 제자리를 지킨 끝에 2015년 “보호할 가치가 높은 서울시 근현대 문화유산”의 반열에 들었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빵다운 빵 맛을 보게 해준 집” “도시화로 인해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많은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향의 흔적.” 빵집 주인 서정복(59)씨는 주민들이 동부고려제과를 미래유산에 추천한 까닭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100% 손으로 만드는 빵
경의중앙선 망우역에서 망우로를 따라 구리 방향으로 100m쯤 가면 이마트로 들어가는 오른쪽 길모퉁이 3층 건물 1층이 동부고려제과이다. 케이크 조각 모양의 공간이 주방을 포함해 10여평 남짓이다. 겉만 보면 전형적인 변두리 동네 빵집이다. 동부고려제과라는 옥호도 이 빵집이 도시가 팽창하던 시절에 도심에서 외곽으로 옮겨온 역사를 충분히 상상케 한다. 그러나 빵만큼은 만만히 봐선 안 된다. 진열대를 채우고 있는 수십여종의 빵과 10여종의 케이크가 모두 100% 수제이다. 롤케이크, 카스텔라는 유화제를 쓰지 않고, 일반 빵은 직접 만든 자연발효 효모로 반죽한다. 주인 서씨가 새벽 5시 반부터 직접 반죽을 치고 굽는 빵들이다. 모양은 특별할 게 없다고 해야 할까? 다소 구식 같은 느낌? 심지어 만주는 옆구리가 터진 듯 속이 다 드러나 보인다. 그러나 먹어보면 금세 느낀다. 손님들이 실속 있는 맛을 느끼도록 피는 더 얇게 하고 속은 더 채웠음을.
본래 경기도 양주군의 농촌 마을이었다가 1963년 서울시 동대문구에 편입된 이곳에 언제부터 ‘서울에서나 볼 수 있던’ 빵집이 들어선 것일까? 동부고려제과가 최초였을까? 아마도 개척자는 동부고려 말고도 몇명 더 있었을 것이다. 1960년대는 산업화·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당시 소설 제목처럼 폭발하는 인구를 따라 빵집도 이동했고, 그중 동쪽으로 향한 흐름이 최후에 닿은 곳이 망우리였을 것이다. 동부고려제과라는 이름에는 그래서 “서울 동쪽에서 제일가는 빵집이 되겠다”는 주인의 결기가 오롯이 느껴진다. 그 희망이 대기업 프랜차이즈, 대형마트의 침공에도 굴하지 않고 40여년의 풍상을 견뎌낸 힘이 되었을 것이다. 동부고려라는 “촌스러운 이름으로” 수많은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 숱한 ‘이마트’와 ‘코스트코’의 포위 속에서도 지역 토박이들에게 한가닥 자부심 같은 추억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반죽을 준비하는 아들을 아버지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동부고려’에 담긴 형제들의 의지
동부고려제과의 역사는 빵집의 역사이자, 우리 근현대사이다. 너도나도 서울로 향하던 1960년대, 전라북도 무주의 서씨 형제들도 고향 집을 나섰다. 첫째 형(정현)은 셋째(정문)를 데리고 센베이 공장에 들어가 밀가루를 다루고, 빵과 과자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마침 1960년대는 밀가루의 시대. 미국의 원조 밀가루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장식 빵 양산체제가 들어섰다. 원조, 군납, 혼분식 장려 등이 양산체제를 뒷받침했다. 삼립빵을 만든 ‘삼립식품’(파리파게뜨의 전신), 크라운 산도의 ‘영일당제과’(현재 크라운제과)등이 날개를 달았다. 1970년대 고도성장으로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태극당’, ‘고려당’, ‘뉴욕제과’, ‘나폴레옹제과’ 같은 유명 빵집들이 성업했다.
유명 빵집의 성공은 서씨 형제들을 크게 고무시켰을 것이다. 큰형 정현(작고)씨가 호기 있게 장충동의 유명 빵집인 태극당 부근에 ‘시민제과’라는 빵집을 차렸다. 그러나 역부족. 서씨 형제들은 1960년대 후반, 이번에는 도심이 아니라 서울 외곽으로 나가 대학가인 이문동에 ‘고려제과’를 열었다. 4형제의 막내인 정복씨도 이 무렵부터 서울로 와서 형에게 빵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다.
경험을 축적한 큰형이 더 동쪽으로 들어가 ‘선점’한 곳이 망우리였고, 지금의 동부고려제과였다. 부근의 시외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상권이 커지면서 장사가 잘되었다. 마침내 서씨 형제들은 차례로 빵집을 내면서 서울살이에 튼튼한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했다. 동부고려제과는 정현씨가 산본 신도시에 ‘고려당’ 분점을 차리면서 막내 정복씨에게 넘어온다. 1993년이었다. “처음 가게를 물려받았을 때 이름을 새로 바꾸라는 조언을 받았지만, 큰형님이 세운 동부고려제과를 제 손으로 보란 듯이 지켜가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손등이 짓무르고 불에 덴 자국이 팔뚝을 다 채울 정도로” 반죽을 하고 빵을 구운 덕분에 동부고려제과는 이 지역 토박이들에게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명소가 됐다. “여기서 돈 벌어 구리로, 양평으로 나간 분들도 망우동에 오면 꼭 들러서 빵을 사갑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입니다. 절대 문 닫지 마세요.”
최근에는 골목상권의 몰락으로 다른 동네 빵집들과 같이 어려움을 겪었지만, 2013년 동네 빵집이 ‘중소기업 적합 업종’에 포함되면서 다소 숨통이 틘 상태이다.
형제에서 아들로…‘가치’를 지켜가고 싶다
서씨는 요즘 대학원에서 운동을 활용한 재활치료학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본래 무술가였다. 빵집을 물려받을 무렵에도 체육관을 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빵 만드는 데도 동양의 오행 사상을 접목한다는 서씨는 손님들의 체형, 걸음걸이만 보고도 체질에 맞는 빵을 권유할 수 있단다. “밖에서 사먹는 빵이 외식이라면, 우리 집 빵은 집밥입니다.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는 밥처럼 몸에 좋고 맛있는 빵을 만들고 있다는 자부심만큼은 대를 이어 지킬 겁니다.”
서씨 부부는 요즘 아들 종혁(31)씨가 대견스럽다. 가게를 이어받기 위해 열심이기 때문이다. 종혁씨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지만 군제대 후 제빵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아버지 반죽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서인지 빵집의 모든 것이 익숙합니다. 빵이 생각한 대로 부풀고 맛을 낼 때, 손님들이 그 맛을 알아줄 때, 아! 이게 내 길이구나 싶죠.” 종혁씨는 아버지에게서 2년 정도 “혹독한 수련을 받은 뒤” 지금은 다른 제과점과 디저트 카페 등지를 다니며 ‘빵 공부’를 하고 있다. 동부고려의 전통과 새로운 트렌드를 접목해 신제품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서씨에게 빵집을 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조언을 요청했다. “한 사람이 수십종의 빵을 만드는 수제 빵집은 점점 희귀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가게는 가치 있는 만큼 힘도 들겠죠? 돈 생각하면 빵 장사 못 합니다. 왜 빵집을 하는가에 대한 소신, 빵 장사한테는 그런 게 있어야 합니다.”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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