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미스코리아 단골 멘트 주인공

마샬미용실 since 1962

등록 : 2017-08-03 15:07
‘미스코리아 제조기’로 명성을 떨친 하종순 마샬뷰티살롱 회장이 모델에게 직접 시연하며 당시 일화를 들려주고 있다.
태극당처럼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와 역사가 된 빵집이 있듯이, 체인점 미용실의 틈바구니 속에서 반세기 넘게 자기만의 브랜드 전통을 이어가는 미용실이 있다. 1962년 문을 연 뒤 55년 동안 여러 우여곡절에도 여전히 “한국을 대표하는 숍”으로 손꼽히는 명동 마샬미용실(마샬뷰티살롱)이다.

1960년대 초, 유행의 주도권이 종로에서 명동으로 넘어오던 무렵 명동 일대에는 18개의 크고 작은 미용실이 경쟁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미용실이 명멸했다. 유명 고데기 브랜드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마샬은 그 많은 별들 가운데 오늘날까지 본래 자리에서 명동을 밝히고 있는 유일한 미용실이다. 그 전통을 인정받아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사업적인 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금싸라기 땅’ 명동에서 5층짜리 자기 건물에 자신의 미용실 간판을 걸고, 강남, 분당 등 전국에 직영점 18개를 거느리고 있는 ‘마샬왕국’의 주인은 ‘미스코리아 제조기’로 더 유명한 하종순(80·마샬뷰티살롱 회장) 헤어디자이너 겸 미용사업가이다. 그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도 “미용실 원장님께 감사드린다”는 미스코리아들의 단골 멘트는 잘 알고 있다. 그 ‘원장님’이 하종순 원장이다. 그는 22살에 미용업계에 투신한 지 30여년 만에 미용사들의 전국단체인 대한미용사회중앙회 회장을 세번 연임(1992~2000)하고, 세계미용협회(OMC) 부회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세계미용대회(헤어월드98서울)를 유치한 공로로 2000년 국민훈장(석류장)을, 2015년에는 중국에 “선진 미용기술을 전수해준” 공로로 중국 미용협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딸과 두 며느리 모두 미용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하 원장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좋은 스승을 만났다

1957년 서울에서 여고를 졸업한 뒤 이모가 경영한 미용실 매니저로 미용업계에 들어온 하종순을 ‘미용사’로 성장시켜준 사람은 유명 헤어디자이너 오엽주(1904~1987)였다. 당시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 미용실을 운영하던 오엽주로부터 “정통 컷 기술을 체계적으로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엽주는 20대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던 ‘신여성’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쌍꺼풀수술을 했으며, 일본 영화사의 전속 배우가 되기도 했다. 일찍이 여성미용에 눈을 돌려 일본에서 선진 미용기술을 배워온 그는 1936년 한국 미용사로는 처음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파마를 시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연한 기회에 이런 선구자의 애제자가 되어 컷 기술을 배운 것은 당시 열악한 미용계에서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오엽주를 떠나 충무로에서 여배우들의 머리를 만지며 경험을 쌓은 뒤, 유행의 중심지 명동에서 미용실을 차린 점도 시대의 흐름을 잘 탄 것이었다. 명동에서의 경쟁은 치열했지만, 오엽주의 제자라는 후광, 여배우 등 유명 연예인과의 고객 관계 등이 마샬에 경쟁 우위를 안겨주었다. 배우 강부자, 김창숙, 김자옥, 이미숙 등이 마샬의 단골 고객이었고, 80년대엔 청와대에 ‘출장 파마’를 가기도 했다.

199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미용대회 개막식에서 하 원장(왼쪽 세번째)이 당시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씨(왼쪽 네번째)와 함께 테이프커팅을 하고 있다.
미스코리아라는 무대를 최대한 활용했다


마샬이 미용계 공동의 적으로 발돋움하게 된 전기는 1970년대 텔레비전 중계를 타고 큰 인기를 끈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였다. 미인대회가 성행하자 여성들 사이에서 헤어디자인과 메이크업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당연히 미용산업도 호황기를 맞이했다. 그 흐름을 타 최고 미용실로 떠오른 곳이 마샬이었다. 마샬미용실에서 대회를 준비한 후보자들이 대거 미스코리아 상위권에 입상하면서 유명세를 탔기 때문이다. “미스코리아가 되려면 마샬의 하종순 원장을 찾아가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1970년대에는 1977년 김성희씨에 이어 손정은, 서재화씨가 3년 연속 미스코리아 진에 뽑혔고, 1990년대에도 이영현(1991), 유하영(1992), 궁선영(1993)씨 등이 연속으로 진에 뽑히는 등 유명 미스코리아 배출이 잇따랐다. 고현정(1989년 선), 염정아(1991년 선)씨 등 나중에 유명 배우가 된 입상자들도 마샬에서 머리와 메이크업을 하고 워킹과 화술을 다듬었다. 1990년대 초까지 20여년 동안 무려 미스코리아 120명을 만들어냈으니, 미스코리아의 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남들보다 먼저 해외 미인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컸지요. 유럽 등 유행을 선도하는 지역의 최신 트렌드를 앞서서 흡수해 접목할 수 있었으니까요.”

1990년대 이전만 해도 일반인들은 해외 여행을 하기 어려웠다. 매년 미스코리아를 배출한 하 원장은 미인대회 샤프롱(보살펴주는 사람) 자격으로 해마다 며칠씩 미용 선진 지역을 다니며 비달 사순 등 유명 헤어디자이너 아카데미에서 최신 기술과 유행을 직접 체험하고 배울 수 있었다. “새로운 유행으로 미스코리아를 배출하면 이듬해 다른 미용실이 그걸 따라해요. 그때 저는 또 다른 최신 유행을 선보이니, 다른 미용실이 우리를 뛰어넘기 어려웠을 거예요.”

미스코리아 입상자들과 함께.
미스코리아의 상징과 같던 이른바 ‘사자머리’ 스타일도 하 원장의 작품. “외국대회에 나가 보니 많은 참가 미인들이 머리를 크게 부풀려요. 머리는 더욱 우아하고 얼굴은 상대적으로 작아 보여서 왕관을 얹으면 마치 여왕처럼 보였어요.” 이 고난도의 테크닉을 배워 적용한 미스코리아가 고현정씨였다. 수많은 미스코리아 가운데 고씨가 단연 돋보이는 미인이었다고 회고하는 하 원장은 “그때 고등학생 신분만 아니었다면”이라는 말로 진이 못 된 아쉬움을 표시했다.

하 원장이 배출한 것은 미스코리아뿐이 아니다. 1980~90년대 프랜차이즈 미용실 시대를 주도한 박승철, 박준, 이철(부인), 이훈숙씨 등 유명 미용인, 자끄데상쥬, 한스, 헤어뉴스 같은 미용업계 경영인들도 명동 마샬미용실 출신이라고 한다.

명동 마샬미용실 내부 모습.
남은 인생은 미용인재교육에

우리나라에 처음 미장원이 생긴 것은 1920년. 전국 단위 통계는 알 수 없지만 1953년 한국전쟁 이후 서울에 158개의 미장원이 있었다는 조사가 있다. 1960년대 들어 고도성장과 함께 미용실도 크게 증가했다. 1988년 말 4만3500곳이던 미용실 수는 10년 뒤인 1999년 말 8만4000여곳으로 거의 배 가까이 늘어났다. 민주화, 여행자유화, 여성의 사회 활동 증가 추세와 맥을 같이했다. 전국 미용실 전화번호를 수록한 <미용업 현황 2015>(CD·한국콘텐츠미디어)에 따르면, 2014년 현재 우리나라 미용실 수는 8만3000곳. 이 가운데 경기도 1만9111곳, 서울 1만5507곳 등 수도권에만 전체 미장원의 42%인 3만4618곳이 영업 중이다. 인구증가 둔화와 함께 동네 미장원 증가 추세는 정체되었지만, 국내외 유명 헤어디자이너를 내세운 프랜차이즈 미용실은 증가 추세에 있다. 2014년 현재 프랜차이즈 미용실은 1460개로 조사돼 있다.

미용업계에 체인점이 대세를 이룰 때도 하 원장은 직영을 고수했다. 18개의 지점도 대부분 본점에서 육성한 디자이너가 독립한 직영점이다. 미용실은 각 미용사가 개인 사업자나 다름없다. 고객들이 자기가 원하는 미용사를 찾아 머리를 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용사가 고급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미용실이 고객을 많이 확보하기 어렵다.

“지점이 10개 이상 되면서부터 인력풀의 한계를 느꼈어요. 매년 해외 유명 미용강사를 초청해 소속 디자이너들을 교육하는 것도 우수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미용산업 성패의 핵심을 인력관리, 특히 선진 미용기술의 지속적인 습득을 꼽는다.

“잘 키운 디자이너를 빼앗길 때는 죽고 싶을 정도로 마음의 상처가 크지만” 그렇다고 교육을 멈출 수는 없다고 한다. “내일 마샬을 떠나더라도 오늘 교육은 한다”는 것이 하 원장의 신조이다.

하 원장은 고령이지만, 미용에 대한 열정은 젊은이 못지않다고 자신한다. “일흔아홉으로 나이 먹는 일은 끝”이라는 그는 남은 인생을 우수 미용인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운영에 바치고 싶어 한다. 마샬미용실은 2000년부터 ‘L.C.F 코리아’라는 프랑스 제휴 미용교육서클을 만들어 매년 2회씩 해외 유명 헤어디자이너와 전문강사를 초청해 회원들에게 최신 흐름과 기술을 전수받게 하고 있다. 프랑스 헤어디자이너 겸 미용교육기관 경영자인 라파엘 페리에와 한국-프랑스 합작 미용교육기관을 서울에 세우는 일도 논의 중이다.

마냥 성공한 듯 보이는 하 원장의 인생에도 굴곡진 부분이 없지 않다. 1993년 미스코리아 선발 부정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 등 ‘법난’을 치렀다. 그는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억울해 잠을 못 잔다. “사진기자들이 갑자기 카메라를 들이대는 바람에 놀라 엉겹결에 핸드백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죄 없는 내가 왜 바보같이 그랬는지….” 실제로 하 원장은 항소심에서 무죄로 풀려나 일상에 복귀했고, 맡고 있던 미용사회 회장직을 그만두라는 요구도 달리 없었다.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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