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3대째 80년을 이어온 대장간의 빛나는 미래

동명대장간 since 1956

등록 : 2017-08-17 14:47 수정 : 2017-08-17 14:57
창업자 ‘서울 동쪽 최고 대장간’ 꿈꿔

2대 강영기씨는 세번 도망 끝에 정착

70~80년대 건설 붐으로 돈도 벌고

정도 600년 기념 서울 명소에도 선정

아버지 반대에도 대장간 일 3대 단호씨

자기 손으로 대장간 100년 열겠단 각오

‘문화 비즈니스 공간으로 진화’ 상상


웬만한 월급쟁이 수입보다 나아

동명대장간 2대 강영기·3대 단호씨 부자가 포클레인 장착용 정을 만들고 있다. 화덕에서 달군 쇠를 메질기계로 150회 이상 두드린 후 아들 단호씨가 쇠메로, 아버지 영기씨가 손망치로 번갈아 치며 정끝을 다듬고 있다.
요즘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시뻘겋게 달군 쇠를 벼려 무엇이든 척척 만들어내는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다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중에 강동구 천호사거리에 가면 80년째 가업을 이어가는 곳이 있다. ‘동명대장간’(천호동 556-5)이다. 할아버지 대부터 손자까지 3대를 이어 100년을 바라보는 대장장이 가문은 전국에서도 흔치 않을 것이다.

1대 대장 강태봉(2002년 작고)이 “서울 동쪽에서 제일 가는 대장간”을 꿈꾸며 대장간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지은 것은 1956년. 처음 대장일을 시작한 곳은 1937년 고향 철원이었다. 강씨 집 사람들은 이 해를 가업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 태봉은 2대 영기(66)씨가 열네살이 되자(1964년), 하나뿐인 아들에게 쇠메(긴 나무자루를 끼운 망치)를 들게 했다. 모루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아들이 쇠를 벼리는 부자 대장간의 출발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인 2006년, 이번엔 26살이 된 3대 단호(37)씨가 아버지 영기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쇠메를 들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서울 강남 지역의 유일한 전통 대장간

조선 시대 풍속화에서처럼 대장간은 몇 사람이 조를 이뤄 화덕에 불을 지펴 쇠를 달구고, 두드리고, 담금질해 농기구·말편자·무기 따위의 철제 용구를 만드는 전통 공방이다. 불을 지피는 풀무질, 망치로 쇠를 두드리는 메질(야장), 달군 쇠를 잡아주고 담금질을 하는 등 전체 작업을 주도하는 대장 등 세 가지 역할이 기본이다. 현대에 와서는 풀무와 메질 기계가 개발되어 두 사람이면 전체 공정을 할 수 있다. 그래도 불과 쇠를 다루는 일인 만큼 무척 위험하고 힘든 육체노동이다.

사람 손으로 쇠를 다루는 전통 대장간들이 대량생산이 가능한 기계화·공장화의 추세에 밀려 대부분 사라져갔지만, 소수의 살아남은 대장간들은 장인의 기술력과 희소성을 인정받으며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건축 공사에 따른 수요가 여전히 있는데다, 주말농장 등 도시농업의 발달, 자가 제작을 즐기는 여가 문화 등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루와 망치.
동명대장간은 서울 강남 4구 지역의 유일한 전통 대장간이다 보니 지명도도 꽤 높은 편이다. 기자가 취재를 간 지난 9일 오후에도 두 팀의 사진가가 촬영 협조를 구하러 왔고, 여러 손님이 주문한 물건을 찾으러 왔다. 건설 일을 한다는 이당희(64)씨는 20년 고객이다. “이 집 제품은 담금질 솜씨가 좋아서 쇠의 강도가 남다르다. 전문가라면 금세 알 수 있다”고 칭찬한다. 최원배(70)씨는 주문한 보도블록 집게 3개를 찾으러 경기도에서 왔다. “인근에 철공소가 있지만 손에 맞지 않았다”는 최씨는 가져온 보도블록을 집게로 집어보더니 “딱이야!”라며 만족스러워했다.

방문 손님뿐 아니라 전국에서 주문이 들어온다. 담금질 정평이 높다 보니 동명대장간의 인기 제품은 쇠의 강도가 핵심인 ‘정’이다. 포클레인에 장착해 콘크리트나 돌을 깨는 대형 제품에서 작은 정까지, 주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큰 공사를 맡은 곳에서 한번에 300~400개씩 대량 주문을 할 때도 적지 않다.

아침 6시 반에 문을 열고 저녁 8시에 닫는 동명대장간의 수입은 얼마나 될까? 기자가 영기씨의 이야기를 종합해 대략 속셈을 해보니 연 매출이 적어도 3억원 안팎은 될 것으로 보였다. 3대 단호씨가 대장일을 하기 전에 다니던 직장을 계속 다녔다면, 10여년이 지난 지금 어느 쪽이 더 연봉이 많을까? “아, 봉급이요? 당연히 동명이죠.” 10여년 전 대장장이의 길을 가기로 한 자신의 선택에 자부심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동명대장간 바깥 풍경.
3대의 선택, 미래

3대 단호씨는 11년째 아버지와 함께 쇠를 벼리고 있다. 풀무질과 기초 메질은 기계가 하므로 육체적으로는 아버지가 일을 배울 때보다 덜 힘들지만, 아버지의 기량을 따라가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10년을 했는데도 아버지 실력의 20%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다”고 한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건축회사를 다닌 단호씨는 위암으로 고생하던 아버지를 보다못해 대장일에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극력 반대했지만, 가업을 잇겠다는 단호씨의 결심은 아버지가 만든 쇠만큼이나 단단했다. “기왕에 가업을 잇기로 한 이상, 내 손으로 두번째 100년을 열겠다는 각오로 시작했습니다. 우리 대장간이 100주년 될 때 제 나이 아직 57살밖에 안 되거든요.”

가업 승계를 결심하면서 단호씨는 “미래의 대장간은 과거의 대장간과 다를 것”이라는 나름의 확신을 먼저 세웠다고 한다. 첨단 디지털 문명 속에서 대표적인 아날로그 문명인 대장간의 희소성과 전통성이 조화로운 가치를 발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어린이집을 다니는 1남 1녀의 가장이 된 지금, 그의 선택은 수입의 측면에서나, 안정성의 측면에서나 모두 성공적으로 보인다. 여기에 그가 꿈꾸는 미래 가치를 더하면?

현실, 2대의 선택

2대 영기씨는 대장장이를 천직으로 아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일찍이 연필 대신 쇠메를 들었다. 지쳐서 졸고 있노라면 아버지는 망치를 두드려 아들을 깨웠다. 너무 고되고 희망도 안 보여 세번을 도망쳤다. 목공 일도 해보고, 리어카 바퀴도 만들어 팔아보고, 공사판을 따라다녀도 보았으나, 결론은 대장간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아버지 곁으로 돌아와 1970~80년대 건설 붐을 함께 타넘으며 집도 한채 살 만큼 돈도 벌어보았다. 보증을 잘못 서 큰 빚을 지고 암에 걸렸을 때, 아들이 대장일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의 울화통만 빼면 그의 인생에서 대장간을 선택한 것은 역시 잘한 일이었다.

강씨가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생존, 1대의 선택

1956년, 앞은 장화를 신어야 건널 수 있는 뻘길, 뒤로는 공동묘지가 막고 선 외진 땅에 새끼줄을 치고 처음 ‘내’ 대장간을 차렸다. 그는 대장장이를 자기에게 부여된 천직으로 여겼다. 하나뿐인 아들에게도 숙명을 요구했다. 마침내 둘은 서울 강남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대장장이 부자가 되었다. 1994년 기록에 따르면, 서울시가 정도 600년 기념 서울 명소 600곳을 선정할 때, 대장간으로는 드물게 강동 변두리의 동명대장간이 뽑혔으니, 대장장이로서 명성도 얻은 셈이다. 물려받을 농토 한뼘 없는 소년이 대장간으로 들어간 것을 선택이라고 할 수만은 없겠으나, 손자에게까지 가업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또한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1대의 절박한 생존투쟁이 2대에겐 현실을 버티는 뿌리가 되고, 3대에겐 미래를 떠받치는 기둥이 되고 있으니, 100년을 향한 동명대장간 이야기는 이미 후편이 쓰이고 있는지 모른다. 단호씨가 3대를 대표하여 말한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내가 대장장이가 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나는 반대하지 않겠다. 내 아들 대한이가 지킬 20여년 뒤의 대장간은 단순히 철제품을 수공으로 제작하는 공간만이 아닐 것이다. 역사와 문명의 시원을 재현하고 학습하며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교육과 문화 비즈니스 공간으로 진화한 대장간을 나는 상상한다.”

그렇다. 어쩌면 3대가 100년을 기다려온 일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는데 왜 반대하겠는가?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