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현(앞줄 맨 왼쪽), 김은지(앞줄 왼쪽 두번째) 학생과 김성훈(둘째줄 맨 오른쪽) 교수가 지난 8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3동 ‘홍제 문화마을’ 골목에서 임시주민협의회 회의 참석차 모인 주민들과 자신들이 그린 벽화가 있는 골목에 모여 함께 사진을 찍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우리 마을과 아무 상관도 없는 학생들이 마을을 위해 이렇게 애써주니 너무 고맙죠. 저희도 못 하던 일이었는데….”(서대문구 홍제3동 문화마을 임금남·62·여)
“지난 수십년 동안 불편해도 그냥 이렇게 사는 거구나 싶었는데…. 학생들이 마을을 위해 뭔가를 하겠다니까 저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정정숙·73·여)
“학생들이 마을에서 얼마나 싹싹하게 활동하는지, 이제 뒤에서 목소리만 들어도 예쁘게 느껴져요.”(김용라·53·여)
지난 8일 서대문구 홍제3동의 한 식당이 주민들의 목소리로 왁자지껄했다. ‘홍제 문화마을’로 알려진 홍제3동 5번지의 주민 10여명이 모인 ‘임시주민협의회’ 자리. 이곳에서 주민들은 예비 ‘지역재생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김은지(28)·김혜현(27) 고려대 건축학과 대학원생 둘과 그들을 지도한 김성훈(39) 동양미래대학교 강의조교수를 앞다투어 칭찬하고 나섰다. 홍제 문화마을이 지난 7월13일 서울시 ‘주거환경관리사업 대상지’로 선정된 데는 이 세 사람의 공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서울시 도시재생본부는 당시 “서울시 주거환경관리자문단의 주민 역량 검증 결과 문화마을이 ‘우수마을’로 평가받았다”며 “앞으로 주거환경 개량을 위해 마을에 18억~20억원의 사업비를 지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정숙 주민은 이를 두고 “인왕산 자락에 있는 우리 마을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라고 평가했다.
그 큰 변화는 세 사람이 2014년 초 서울시 도시재생본부가 주최하는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학생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낯선 홍제동을 조사차 찾으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아무도 학생들이 이렇게 큰일을 해내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강선행·67·남 주민)
당시 학부생이었던 두 학생은 동료들과 함께 김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공모전을 준비했다. 김혜현씨는 “원래 건축 전공이라 도시는 잘 몰랐는데, 이 분야도 공부해보려고 한 일이었다. 상을 받으면 우리가 구상한 대로 마을 만들기를 실제 해볼 수 있다는 서울시의 발표도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학생들은 사전조사를 통해 주택 한채당 평균 28.3년의 노후도를 지닌 문화마을이야말로 주거환경 개선이 필요한 곳이라 판단하고 마을을 찾았다. 맵짠 바람이 불던 2014년 2월이었다.
학생들은 주민센터 공무원들과 이계열 통장, 권오철 지역활동가에게서 기본 사항을 파악한 뒤 분식집과 슈퍼 등을 찾아 주민들과 인터뷰부터 했다. 그 뒤 ‘보드판’을 들고 ‘스티커 붙이기’ 여론 조사에 나서기도 했고, 밤거리 안전 문제를 진단하기 위해 주야간 길거리 조도를 측정하기도 했다. 그런 노력 끝에 그해 11월 ‘일곱빛깔 홍마루’라는 이름의 문화마을 주거환경 개선 방안을 공모전에 출품했다. 학생들은 당당히 대상의 영예를 안았고, 문화마을은 자연스레 ‘주거환경관리사업 후보지’가 됐다.
학생들이 여기서 그쳤다면 ‘문화마을 역사상 가장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두 학생과 김 교수는 수상 직후 ‘기초조사 용역’을 맡으면서 마을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기초조사 용역은 ‘주민공동체 역량 강화’ ‘마을 이슈 찾기’ ‘마을 내외 주민조직과의 연대 강화’ 등을 추진하는 것이었 다. 한마디로 후보지였던 문화마을을 주거환경관리사업 대상지로 변신시킬 역량을 키우는 사업이었다.
2015년 8월까지 이어진 기초조사 용역 기간에 학생들은 워크숍, 마을잔치, 스티커 붙이기를 이용한 주민 의견 수렴, 게릴라 티타임, 마을사진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주민들의 마음을 열어나갔다. 학생들은 이런 프로그램으로 기초조사 용역 기간에 30% 이상의 주민들로부터 주거환경관리사업에 대한 동의서를 받기도 했다.
조사용역이 끝난 뒤에도 학생들은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마을 주민들에게 다가가면 주거환경관리사업 대상지 신청을 하는 데 필요한 ‘주민 50%의 동의’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이번에는 서울시에서 파견하는 예비 ‘지역재생 활동가’가 돼서 매주 마을을 찾았다.
이렇게 되자 마을 주민들의 마음도 크게 열리기 시작했다. 주민 정정숙씨는 “처음엔 학생들이 모이라 해도 주민들이 늦게 오거나 잘 안 모였다”며 “그런데도 학생들이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주민들이 차츰 감동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지역재생 활동가로서 주민들과 함께 2016년 실시한 ‘마을 벽화 그리기’도 주민들의 마음을 여는 데 한몫을 했다. 서울대·동양미래대·국민대 학생들이 자원봉사 등으로 2016년 여름 한달 가까이 벽화 그리기를 하면서 골목길이 바뀌는 것을 본 주민들이 진짜 우리 마을도 변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주민 강선행씨도 “이 벽화를 보고 비로소 학생들이 말하는 주거환경개선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꾸준한 활동 덕에 학생들은 지난 4월 드디어 50% 이상의 주민 동의를 받아 주거환경개선사업 대상지 신청을 했고, 지난 7월 마침내 ‘큰일’을 해냈다.
그러나 이날 임시 주민협의회 자리에서 주민들은 “학생들이 해낸 ‘진짜 큰일’은 따로 있다”고 입을 모았다. 바로 사그라들었던 마을공동체를 향한 꿈을 다시 살려낸 것. 마을 축제나 벽화 그리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이웃 간에 친근감이 되살아나고 있다. 김혜현씨는 “친환경 화장품을 만들거나 밑반찬 만들기를 배우는 젊은 엄마들 모임이 곧 시작이 될 것이다”고 살짝 말한다.
하지만 변한 것은 마을만이 아니다. 지난 4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마을이 변하는 것과 함께 학생들도 그만큼 성숙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김은지 학생의 경우 예전에는 주변에서 ‘너 왜 그렇게 말이 없느냐’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홍제3동 문화마을 일을 하면서 ‘너 왜 그렇게 활달하고 말이 많아졌느냐’는 얘기를 듣는다”고 귀띔한다. 학생들이 건축을 보는 시각도 홍제3동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이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크게 변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김 교수는 이날 임시주민협의회를 정리하면서 “앞으로 마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겠지만, 세 사람은 주거환경개선사업이 완료될 때까지 마을 주민들과 함께 배우며 같이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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