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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대골’ 살리기 나선 청년들, ‘마을살이’ 실험 5년

서울시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학생공모전’에서 태동한 소셜 벤처 ‘블랭크’ 이야기

등록 : 2017-08-17 15:46
2012년 성대골 마을 이야기 금상

‘생활 공간 되살림’ 소셜 벤처 만들어

일하고, 쉬고, 머물 공간 차례로 마련

구성원·사업 영역·마을 활동 변화 중

지난 2일 동작구 상도동 성대골 마을의 열린 주민 공간 ‘청춘 플랫폼’에서 공유 사무실 ‘청춘 캠프’의 청년들이 점심을 준비해 나눠 먹고 있다.(왼쪽 사진) 지난해 청춘 플랫폼에서 열린 프리마켓 모습. 류우종 기자 wiryu@hani.co.kr, 블랭크 제공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도 마을이 있을까?’ 건축과 도시를 전공한 김동리(33), 한재성(33), 강혜원(28), 문승규(30)씨는 이런 의문을 풀어보려 2012년 3월 서울시가 주최하는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학생공모전’ 준비에 나섰다. 먼저 대상 지역을 찾았다. 몇몇 동네의 주민들과 인터뷰하며 공동체를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살펴본 뒤, 동작구 상도동 성대골 마을을 선택했다.

성대골 마을은 재개발을 비켜 간 서울의 몇 안 되는 곳이었다. 저층 주거 밀집지역으로 대부분의 건축물이 70~80년대에 지어서 낡았고, 버려진 공간들도 있었다. 동네 곳곳이 안전 사각지대였고, 2만5000여명이 사는 동네에 초등학교조차 없었다. 동네 생활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성대골 엄마들이 스스로 나서서 어린이도서관을 만들고, 마을학교를 운영하는 등 꽤 활발한 주민 자치활동을 하고 있었다.

네명의 학생들은 ‘들숨날숨 성대골 마을 이야기’라는 주제로 주거환경 관리 사업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학교와 에너지 자립에 대한 주민의 희망을 반영해 마을 길을 만들고 커뮤니티 공간과 주민 편의시설을 보강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서울시 도시재생사업본부가 실제 사업으로 이어지게 상도동을 주거환경관리사업 대상지로 선정하고, 기초조사 사업을 이들에게 맡겼다.


이즈음에 문씨와 김씨는 성대골로 아예 이사했다. 당시 문씨는 “주민의 시선으로 마을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마을에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커뮤니티 디자인을 하는 소셜 벤처를 만들어 ‘블랭크’라고 이름 붙였다. 블랭크는 비어 있다는 뜻으로, 오래되거나 버려진 마을의 공간을 주민들과 살려간다는 지향점을 담았단다.

블랭크는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과 당시 책임연구원이었던 이종호 교수의 도움을 받아 먼저 공간을 마련했다. 2013년 4월 동네의 단층 상가건물 33㎡(10평)를 월세로 빌렸다. 처음 몇달 동안 플라스틱 우유 상자를 의자와 책상 삼아 일했다. 출입문이 유리라 사무실 앞을 오가던 주민들이 들어와 말을 걸기도 했다. 그해 가을 ‘성대골사람들’ ‘동작청년회’ 등 주민모임과 함께 서울시 마을공동체 공간 지원 프로젝트에 지원해 리모델링 비용을 마련했다. 조리시설과 식탁을 넣어 작은 공간에 ‘나눔 부엌’이 들어섰다.

마을공동체를 위한 열린 공간이 생기면서 블랭크의 마을 활동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청춘 플랫폼’이라고 알려진 이 공간에서 그간 주민들과 함께하는 여러 모임과 요리, 뜨개질, 캘리그래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열렸다. 블랭크의 커뮤니티 매니저 김수연(30)씨는 “지난 한해 이곳에서는 13번의 소모임, 17번의 청춘 식탁, 8번의 요일가게, 38번의 대관이 있었다”고 전했다.

2015년부터 블랭크는 99㎡(30평) 크기의 공유 사무실인 ‘청춘 캠프’도 운영하고 있다. 일러스트레이터, 사진작가, 그래픽 디자이너 등 10명이 이곳에 들어왔다. 김씨는 “비용을 나눠 부담을 줄이면서 동네에서 함께할 수 있는 일이나 서로의 프로젝트 진행에도 도움을 주고받는다”고 말했다.

마을과 함께하는 5년 동안 소셜 벤처 블랭크에는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2015년 법인으로 전환되었고, 올해는 건축사사무소로 등록하고 디자인과 커뮤니티 두팀으로 나눠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구성원에도 변화가 있었다. 창립 멤버인 한씨는 2013년 취직해 떠났고 문씨는 군 복무, 김씨는 목공일을 배우기 위해 지금은 블랭크를 떠나 있다.

현재 블랭크 직원은 7명이다. 초기 멤버와 달리 대부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삶을 찾아 이곳으로 옮겨왔기에 마을활동보다 이상적인 일터와 삶터에 대한 기대가 더 큰 편이다. 2014년 블랭크에 입사해 가장 오래 함께해온 디자이너 김지연(28)씨는 “블랭크는 청년들의 마을살이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일하고, 쉬고, 머무는 공간을 마련해가고 있다. 쉬는 곳으로 청춘 플랫폼, 일하는 곳으로 청춘 캠프를 이미 마련했고, 10월쯤 머무는 곳으로 공유 주택인 ‘청춘 스테이’를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마을활동과 마을사업에서 수익을 내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고민 속에서 블랭크는 나름의 마을살이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재능 교환 프로젝트에 참여해 리모델링 작업 등 동네 생활공간 늘려가기에 한몫을 하고 있다. 동네 이주여성들이 베트남 쌀국숫집인 ‘아시안보울’을 차릴 수 있도록 힘을 보탰고, 30년 가까이 운영돼온 동네 책방 ‘대륙서점’이 문 닫을 위기에 빠졌다는 소식을 청춘 플랫폼 모임에서 들은 주민이 인수해 다시 문을 여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요즘 블랭크는 청춘 플랫폼에서 화·금요일마다 창업을 꿈꾸는 주민들이 자신의 아이템을 갖고 시범 운영을 해볼 수 있게 요일가게를 연다.

사업 영역에서도 블랭크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문래초 학생들과 학교 공간을 함께 바꾸는 일을 하고, 인천에서는 청년을 위한 커뮤니티 공간을 함께 기획, 설계하고 있다. 독산동, 대방동 등 마을활력소 사업에도 참여한다. 다른 소셜 벤처와 함께 지방 소도시의 전통시장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다. 김수연 매니저는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네를 넘어 다른 지역, 더 나아가 지방 소도시에도 공동체를 중심으로 마을살이가 이뤄질 수 있도록 일하려 한다”고 말했다.

구성원과 사업, 마을활동 방식의 변화에 따라 블랭크에 대한 주민과 마을활동가의 평가가 엇갈리지만, 청년들이 마을에 들어와 있는 것만으로도 동네에 활력이 된다는 긍정적 의견이 더 많다. ‘성대골사람들’ 김소영 대표는 “블랭크 초기 멤버들이 녹록지 않은 여건에서 마을활동에 뛰어든 것만 해도 대단했고, 이들이 기댈 언덕 없이 마을에 들어와 마을을 살리려 하는 것 자체가 애틋하게 느껴졌다”고 평가했다. “블랭크 식구가 되어 마을로 들어온 청년들이 마을 현안 해결에 함께하지 않더라도, 나름의 방식으로 마을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현숙 기자 h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