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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의 현장, 치유의 공간으로 재탄생”

남산 옛 중앙정보부 6국 지하실의 전시실 탈바꿈 책임자 배다리 작가

등록 : 2017-08-24 14:53
내년 8월 공원화 사업 완공 예정

고문 자행하던 중정 6국 지하실

“잊지 말자”는 취지 ‘기억6국’으로

빨간 우체통 콘셉트로 공간 꾸며

‘사회참여 예술’을 지향하는 배다리 작가가 지난 16일 서울 중구 남산 예장동 공원 조성 현장에서 시국사범 고문 장소로 쓰이던 중앙정보부 6국 지하실 해체 작업을 지켜보며 새로 들어설 전시실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작품을 진행하는 동안 가슴이 너무 답답함을 느꼈어요.”

지난 16일 중구 예장동 옛 중앙정보부 6국 터에서 만난 배다리(47) 작가는 지난 10개월의 작업 과정에서 계속 가슴이 먹먹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아픈 역사의 무게 탓이었을까?

지난해 10월부터 그는 유신 시절 대표적 인권 침해 장소였던 6국 지하실을 전시실과 광장으로 재구성하는 디자인 작업을 진행했다. 1970년대 초부터 남산 일대에는 중앙정보부 건물이 40곳 정도 있었고, 현재 15곳 정도 남아 있다. 그중 명동에서 남산 정상에 오르는 가장 가까운 길인 예장동에 있는 ‘6국’은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사건 등 시국 사건 관계자들을 고문해 ‘빨갱이’를 만들던 대표적인 장소였다. 그래서 ‘고기 육 자, 육국(肉局)’이라는 별칭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서울시는 2015년부터 이 6국과 옛 교통방송 건물 등을 헐고 이곳에 공원을 만드는 ‘남산 예장자락 재생사업’을 하고 있다. 6국 건물은 이미 지난해 8월 헐리고 현재는 고문이 자행됐던 지하실만 남은 상태다. 내년 8월 완공 목표인 이 공원화 사업에서 배 작가는 6국 건물 지하실을 ‘기억6’이라는 전시실과 광장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맡았다. 기억6은 중앙정보부 ‘6’국과 같은 부끄러운 역사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기억’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그동안 어떤 색깔의 작품을 주로 해왔나?

“이화여대 조소과 학부와 대학원을 나온 뒤 2009년 영국 런던예술대학에서 석사를, 2011년부터는 영국 왕립예술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했다. 전공은 ‘사회참여 예술’이다.”

배 작가의 전공인 사회참여 예술은 가장 진보적 예술 분야로 꼽힌다. 단순히 관객에게 보여주는 예술이 아니라, 관객과 함께 진행하는 과정 자체가 내용이 되는 예술작품을 만들면서 사회 변화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의 기존 작품들 또한 기지촌 여성들에 관한 내용을 조사해 영상과 사진·설치로 표현했던 ‘보통이름 숙자' 전시(2014년), 서울역 주변 노숙인들과 함께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했던 ‘길 프로젝트’(2015년) 등 사회성 짙은 것들이었다.

이번 작품을 위해 중앙정보부와 인권 문제에 관한 공부를 많이 했을 것 같다.

“이 공간에 대해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접근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6국’에서 고문을 겪은 분들 인터뷰였다. 고은 시인, 양길승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이사장, 최민화 민청학련계승사업회 대표 등 6명을 인터뷰했다. 그 이야기를 토대로 이 공간의 재구성 방식을 고민했다. 국가폭력 앞에서의 무력감이 전달되어 답답함이 느껴진 것 같다.”

중앙정보부는 ‘2012년 댓글공작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부당한 방법으로 국가폭력을 자행해왔다. ‘기억6’은 무력감을 넘어 그 ‘현존하는 국가폭력’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구실을 할 것이다.

‘기억6’ 조감도. 배다리 작가 제공
그러나 시민들이 전시실을 볼 때마다 그런 답답함을 느낀다면 곤란할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전시실이 진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장소가 되기를 희망한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일은 질문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시민들이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전시기획을 통하여 창조적인 경험을 하는 공간과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이러한 생산적인 시간과 공간이 실질적인 치유 공간 구실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배 작가는 “고문을 받은 분들이 인터뷰를 위해 몇십년 만에 6국을 찾았을 때, 그렇게 강직하게 살아오셨던 분들도 발조차 제대로 못 떼시는 것을 봤다”며 “그만큼 고문의 트라우마는 무서운 것”이라고 말한다. 배 작가는 이어 “그분들도 서울 시민들이 그런 고통을 그대로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그래서 전시실을 빨간 우체통 콘셉트로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옛일을 기억하되 현재 시민들에게는 쉼터가 되고, 그래서 역사적 치유 공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빨간 우체통을 통한 소통과 치유는 어떤 것인가?

“직접적인 고문 현장을 성질을 바꾸어서 전달하는 것이다. 우체통은 그 현장을 시민들에게 트라우마의 장소가 아니라 역사에 말을 걸고 소통하는 곳으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빨간색은 과거 인권 침해 역사 중 많은 것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시실 주변이 숲이 될 텐데, 그때 빨간 전시실은 시각적으로 그런 의미를 잘 전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시는 전시실의 모습과 관련해 “1층에는 자료 검색이 가능한 아카이브와 다큐멘터리 등 영상을 상영하는 프로젝터 등이 설치되며, 전시실에 있는 엽서에 시민들이 직접 적은 메시지를 빔프로젝터를 통해 내부 벽면에 표출하는 참여형 전시도 진행될 것”이라고 한다.

이날 배 작가와 인터뷰를 한 ‘남산 예장자락 재생사업’ 현장에서는 6국 건물 중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던 지하실을 문화재 이전·복원 전문업체가 해체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됐다. 거대한 크레인이 취조실을 구성했던 두꺼운 벽을 끌어올려 해체하는 것이다. 이 벽들은 1년간 보관됐다가 내년 8월 전시실이 완공되면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다시 설치될 예정이다. 앞으로 1년 뒤, 자신이 기획한 ‘기억6’ 전시실에서 시민들과 함께 먹먹함을 털어버리고 생산적인 시간을 함께하는 배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