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아지고 아침저녁 바람 서늘해지는 가을이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처음 우리 손으로 지은 새 시청사 건물이 들어선 지 햇수로 5년이 된다. 건축계 인사들뿐 아니라 건축에 특별한 관심이 없던 시민들까지도 서울시 신청사를 보고는 한마디씩 의견을 보탠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이후로 우리 역사에 이렇게 말 많은 건축물은 또 드물지 않나 싶다.
설계 공모 당선작이라고 뽑아놓고는 이건 아니다 뜨끔했던가 보다. 기껏 돈 들이고 시간 들여 얻어낸 당선 안을 엎고 뒤집어 다시 설계를 시킨 것만 댓번은 더 되었던 것 같다. 도시 만지는 일을 애들 방에 그림 하나 거는 것쯤으로 여기니 그 뜻인들 제대로 서겠는가? 그러고도 영 마음에 안 찼던지 몇명 건축가를 어찌어찌 선정해 초청 공모를 또 했다. 그 지난한 산고의 과정을 견디고 겨우 태어난 귀한 늦둥이가 바로 허울만 남은 구청사를 덮고 있는 그 유리 건물이다.
“신의 생각이 필요하다”고 했던 지도교수
벌써 30년이나 지난 어느 해 겨울에, 나는 지도교수의 연구를 돕느라 학교 연구실에서 방학을 보냈다. 그때의 과제가 옛 서울시청 건물을 그냥 두고 더 크게 고쳐 쓰느냐, 새로 짓느냐, 옮겨 짓느냐를 요모조모 저울질하는 것이었다. 옛 시청사는 일제의 잔재인데다, 빼어나게 잘생기거나 대단한 건축적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끔찍한 전쟁과 어려운 시절을 살아냈고 시청사로 자리매김한 지도 꽤 되어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는 했다. 이전할 터로 물망에 올랐던 땅들도 기존의 시청 자리에는 비견할 만한 급이 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해묵은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당시 관련 회의에서 지도교수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다. 참석자 중 한 사람이 “제 생각에는 말입니다…”라며 꺼낸 말을 매몰차게 자르며 하신 말씀의 요지는 이런 중차대한 일에는 일개인의 아이디어가 아닌 신의 생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 신의 생각이라니…. 종교도 없었던 선생님의 뜻은, 한 국가의 수도를 위한 시청사를 단순히 한채의 건물로 여겨서는 안 되며, 그것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에는 단편적이고 감정적인 인간 수준의 생각을 뛰어넘는 신의 생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신이라면 어찌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신의 생각에 최대한 근접한 완벽에 가까운 결정을 내려야 할 책임이 있다는.
수도의 새 청사는 완벽에 가까워야
옛 청사도 덕수궁과 어울리지 못했지만
새 청사는 어느 날 뜬금없이 ‘불쑥’
덕수궁과 그림을 만들지 못하는 새 청사
긴 울림을 주었던 영화 <어웨이 프롬 허>(사라 폴리 감독, 2006)의 주인공 피오나는 알츠하이머로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 남편과 숲을 걷다 만난 노란 꽃이 벌레를 부르는 원리를 알려주며 말한다. “자연은 단순히 예뻐 보이려고 장식을 하진 않아요.” 그런 것이 인간과 자연 혹은 신의 차이일까? 자연의 어떤 부분도 의도나 기능 없이 장식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지만, 장식을 위한 장식, 형태를 위한 형태를 만들고는 거기에다 의미를 덧대어 붙이려 애쓰는 것이 한낱 인간의 한계일까?
덕수궁은 마땅한 자리에 참 곱게 앉아 있다. 정동으로 놓인 건물들도 고궁 곁에서 적당한 어울림을 이루어 좋고, 그 동네를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겁다. 하지만 근대 건축인 옛 시청사는 덕수궁과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었다. 후하게 값을 쳐주어도 부근의 호텔 등이 만들어낸 대조적인 그림의 톤을 약간 눌러주는 정도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새로운 시청이 생겨났다. 어느 날 뜬금없이 불쑥 생겨났다. 새로 놓일 시청사에 대해 너무도 오랜 시간, 너무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기에 뜬금없다는 말이 더 뜬금없겠지만, 그 건물을 보는 대부분의 이들이 틀림없이 뭔가 뜬금없음을 느꼈을 것이다.
덕수궁을 덮칠 듯한 쓰나미 형상
고층으로 설계했다가 이미 퇴짜 맞은 이전 설계안들과 주변의 도시적 맥락만 살펴봐도 당연한 결과인 수평적 구성을 한 것이 설계자에게는 대단한 자부심인 듯하다. 높지만 않으면 그저 주변과 어울릴 것이라는 단순한 셈은 생뚱맞은 형태 때문에 금세 틀어진다. 주변의 어떤 것보다도 거대하고 고압적인 느낌의 한 덩어리 유리 건물은 설계자가 희망한다는 밝고 가볍고 열린 건축과의 거리를 메우기 불가능할 정도로 벌여놓았다. 설계자는 자신의 성과물을 던져놓고 여전히 득의만만한 웃음을 보이지만, 소비자들은 가스만 가득한 과자봉지를 받아든 느낌이라면, 이것은 귀 막고 제 의도만 되뇌는 설계자의 패배다.
주변의 역사적 흔적들을 고려했고 기와지붕의 처마 선을 현대적으로 표현했다는데도, 영락없이 옛 시청을 덮치는 쓰나미 아니면 볼록눈이 도마뱀이라는 평만 넘친다. 그 쓰나미가 광장을 지나 평화로운 덕수궁마저 덮칠 기세다. 온종일 거울 들여다보며 누가 제일 예쁘냐고 골백번 물어봐야 넌 아니라는 싸늘한 답만 듣던 백설 공주 계모처럼, 지나는 누구도 전통적 처마로 봐주지 않고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으로 듣는다면, 미안하지만 이번에도 공감능력 부족한 설계자의 패배다.
업무시설로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
새 시청사는 업무시설에 충실했어야 했다. 청사의 신축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시청 직원들을 모아 업무 효율을 높이는 목적이 우선이어야 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조경 벽이라며 기네스북에 올리고, 1㎡에 50만원이나 하는 터무니없이 비싼 필름을 삼중 유리에 붙여 불빛 예쁜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건물을 만들자고 수천억 세금을 쓰기 전에, 부족한 공간 먼저 확보하고 유지관리 문제부터 단단히 살폈어야 했다. 업무용 공간은 전체 면적의 절반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데 유치원생 견학에 딱이거나 건축적 주장이 난무하는 공간이 널려 있다면, 이번에는 미안할 필요도 없이, 설계자의 완패다.
건축주는 이미 설계 공모에서 당선된 안을 이런저런 이유로 변경하고 또 변경하다, 제한된 건축가 몇에게 또다시 설계를 공모했다. 그래서 나온 설계안 중 몇은 폐기된 안들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 그리 노심초사해가며 주문했는데 업무적 효율은 고사하고 동서남북 제각각인 놀이공원 같은 물건이 대신 배송됐으니 장고에 악수 두었다는 소리가 안 나올 수 없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긴 시간 동안 수많은 도상 훈련을 거치고도 제대로 된 공간 프로그램도 주장하지 못한 채 이런 결과를 받아들였다면, 이번 문제는 건축주의 패배다.
우유부단 행정과 세련되지 못한 안목
우리는 더 나은 시청사를 가질 수 있었고, 그랬어야만 했다. 충실한 업무 공간이면서도 덕수궁과 주변 환경을 배려하고 시민들의 그늘이 되어줄 공간이 있는 시청. 화려하진 않아도 깔끔하게 차려입은 세련된 건축물을 우리나라 수도의 시청사로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행정에 세련되지 못한 안목, 기능을 내팽개친 고집스런 욕망에 섣부른 선택까지, 신의 뜻을 헤아리기는커녕 평범한 시민들의 마음을 얻기에도 한참 부족했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들이 줄지어 벌어지니 개미처럼 일해서 꼬박꼬박 세금 낸 죄밖에 없는 시민들까지 손도 못 쓰고 억울한 패배를 당했다.
몇년 전 정재은 감독의 서울시청을 다룬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 시티: 홀>(2013) 시사회에 갔었다. 정 감독에게, 촬영하느라 오랜 시간을 함께해서 그런지 시청사와 건축가를 보는 시각에서 ‘스톡홀름 신드롬’(인질이 범인에게 동화되는 심리 현상)이 느껴진다고 농을 했다가 그만 감독을 언짢게 했다. 이 영화는 정 감독이 계획하는 건축 3제 중 두번째 작품이기도 하거니와, 서울특별시 신시청사를 둘러싼 건축계의 슬랩스틱 코미디도 가득하니 한번쯤 경험하시기를 권한다.
정신적 고통은 세월 흐르면 옅어진다고들 하지만, 겨우 다섯해를 넘기고 때에 찌들고 고단해 보이는 서울시 청사의 모습을 보니 정말 그런 날이 올까 싶어 와락 우울해진다.
글·사진 안준석 공학박사·건축가(AIA)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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