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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0만L의 석유탱크, 문화를 채우다
오늘 문화비축기지로 재탄생 41년 전 석유비축탱크 소멸
등록 : 2017-08-31 16:21
1일 공식적으로 문을 여는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문화비축기지 전경. 총면적이 서울광장의 11배 규모인 이곳은 1976년 석유비축기지로 지어져, 산업 발전을 위한 ‘석유’와 ‘냉전’을 상징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41년 만에 석유를 비우고 문화를 채우는 ‘문화비축기지’로 변신해 서울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서울시 제공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의 열광 속에서 차츰 석유비축기지의 존재는 잊혀져갔다. 어쩌면 우리는 그사이 ‘석유’ ‘냉전’ ‘문화’ ‘국제’라는 가치가 혼재하는 상황 속에서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석유비축기지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계기는 2012년 9월1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고건 전 서울시장(재임 1998년 7월~2002년 6월) 등과 석유비축기지 현장을 답사하면서부터다. 석유비축기지 폐쇄 때 서울시장을 맡은 고 전 시장이 박 시장과 환담하던 중 석유비축기지의 존재를 얘기한 직후의 일이다. 이후 2013년 1월부터 시작된 석유비축기지 재생사업을 관통해온 주요 가치는 ‘석유에서 문화로’다. 서울시는 2013년 시민들을 대상으로 산업 유산인 석유비축기지를 활용하는 아이디어 공모전을 진행한 데 이어, 2014년 4월에는 이곳을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기본 구상과 마스터플랜을 세웠다. 또 국제현상공모전을 열어 2014년 8월 ‘RoA건축사사무소’(대표 백정열)와 허서구 당시 한양대 교수팀이 낸 ‘땅으로부터 읽어낸 시간’을 수상작으로 선정하고 친환경 복합문화공원 조성을 추진해왔다. 이 과정에서 ‘협치’의 개념도 강하게 작용했다. 최윤종 서울시 푸른도시국장은 “문화비축기지는 사업 초기 설계 단계부터 연인원 1126명(설계 자문 568명, 워킹 그룹 558명)의 시민과 함께 24차례의 설계자문회의와 41회의 실무회의를 하며 운영 방안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최 국장은 이어 “앞으로도 운영 전반에 대한 기획·자문·결정 등의 주요 사안은 민간 전문가 등으로 올해 초 구성된 ‘협치위원회’가 담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정희 협치위원장(문화연대 공동대표)도 “문화비축기지는 설계·시공을 지자체가 다 한 뒤 운영 부문부터 시민이 참여해오던 기존 협치 방식과 다르다. 오히려 민간 전문가가 제안한 콘텐츠에 행정 체계를 맞춘 최초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석유비축기지는 탱크형 문화공간 6개와 야외 공간 하나를 갖춘 문화비축기지로 탈바꿈해 시민들 곁으로 돌아왔다. 기존에 있던 탱크(T1~5) 5개는 공연장·전시장 등으로 재생됐다. 기존탱크 T1, T2를 해체한 내·외장 자재를 재활용해 새롭게 만든 탱크(T6)는 정보교류센터로 태어났다. 또 오랜 기간 월드컵경기장의 임시주차장으로 쓰였던 야외 공간은 문화마당(T0)으로 개방돼 밤도깨비야시장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활동 공간으로 쓰일 예정이다. 하지만 석유비축기지가 문화비축기지로 바뀌었다고 문화의 시대가 바로 오는 것은 아니다. 서울에 있는 석유비축기지는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지만, 한국석유공사는 올 3월 말 기준으로 구리·용인·평택·동해 등 9곳에 비축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또 현재 석유 소비량도 1970년대보다 크게 늘어났다. 문화비축기지 설계자 중 한 사람인 허서구 전 한양대 교수는 “당시 서울시민 한달 소비 분량이던 석유비축기지의 저장 용량이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반나절이면 소비되는 분량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40년 세월 동안 우리의 석유 소비량이 수십배 늘어났다는 얘기다. 어쩌면 우리는 석유시대의 종말을 인지하지만, 석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심화된 아이러니한 시대에 문화비축기지라는 ‘미래의 길을 제시하는 등대’ 하나를 얻은 모양새다. ‘석유’는 비워졌지만, 아직 ‘문화’가 그곳을 채운 것은 아니다. 앞으로 ‘문화’와 ‘생태’ ‘협치’ 등 새 개념을 이곳에 채워나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았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