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300여 가게 밀집한 ‘세계 최대 악기백화점’
이인우의 서울 백년가게 11- 낙원악기상가 since1970
등록 : 2017-09-28 13:00 수정 : 2017-10-16 11:19
1000~1200여 악기 종사자들이
총 3만여 종 악기 관련 물품 거래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악기전문상가
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3S 정책 따라
심야 영업 허용하면서 전성기 맞아
낙원상가 은행 지점 현금보유액이
전국 2위일 정도로 호황 구가하다
90년대 초 노래방 등장과 함께 침체
음악의 성지
서울의 한가운데에 있는 ‘낙지’(樂地)라 하여 이름을 얻은 ‘낙원(樂園)동’(1914년 동명 제정)에 언제부터인가 악기를 파는 곳이 생겨나 역시 그 이름에 어울리는 ‘음악의 성지’가 만들어졌다. 서울 종로2가와 3가 사이 낙원악기상가(종로구 삼일대로 428)가 그곳이다. 1970년에 상가가 문을 연 뒤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악기전문상가로 발돋움한 낙원악기상가는 9000여평의 연면적에 300개에 가까운 악기 관련 점포들이 입주해, 1000~1200명의 종사자들이 총 3만여 종의 악기 관련 물품을 국내외 구매자와 거래하고 있다. 이만한 규모의 악기전문상가는 전 세계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기가 어렵다.
낙원상가 일대는 악기를 사거나 수리하려는 전문연주자나 무대를 찾는 연주자들만의 공간도 아니었다. 지금은 주로 ‘실버들의 낙원’이라는 인상이 짙지만, “나팔바지에 통기타를 둘러멘” 젊은 날의 7080세대에게도 추억의 장소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악기전문상가
낙원악기상가는 종로구 안국동에서 용산구 한남동을 잇는 삼일대로의 낙원동 구간 도로 위에 세워진 지하 1층(전통시장) 지상 15층(6층부터 아파트)의 주상복합건물 안에 있다. 본래는 악기점 외에도 볼링장, 카바레와 같은 오락시설과 다양한 품목의 가게들이 영업했으나, 1980년대 초반부터 악기점과 연주 악사들이 대거 모여들면서 대규모 악기전문상가가 됐다. 현재 상가는 2층에 종합악기매장이, 3층에 전문악기매장이 모여 있다. 4~5층은 수입상과 관련된 사무실 등이 입주해 있다. 기타 등 현악기, 색소폰 등 관악기, 피아노 등 건반악기, 드럼 등 타악기 등 각종 악기와 마이크, 증폭기(앰프) 등의 음향기기, 각종 악기 세부 부품들이 전문상가, 종합상가, 수입상, 총판, 공장 직판 등의 형태로 거래되고 있다. 온라인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절반 이상의 점포들이 온라인 쇼핑몰을 함께 열고 있다. 품목 숫자는 통칭해서 ‘3만여 종’이라지만 사실은 “너무나 많아서 누구도 정확하게 말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이 밖에 찾아오는 손님들과 악기 동아리를 위해 합주실, 녹음실 등 연습 공간과 야외무대 공연장도 갖춰놓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의 악기 관련 상품과 정보가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세계 최대 규모의 서양악기전문상가가 본고장인 영국이나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이하기까지 하다.
낙원악기상가의 오늘
낙원상가가 대형 악기전문상가로 발돋움하게 된 데는 전두환 정권의 ‘공’이 크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이른바 3S(섹스, 스크린, 스포츠)로 상징되는 소비문화를 진작하기 위해, 밤 12시 이후 야외활동을 금지한 ‘통행금지’제도를 해제(1982년 1월5일)하고 심야 영업을 허용함에 따라 룸살롱 등 각종 유흥업소가 번창하면서 악사와 악기 수요가 급증했다. 악기상과 악사들이 집결된 낙원상가가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했음은 물론이다. 1980년대 초 낙원상가 지점 은행의 현금보유액이 전국 2위(1위는 압구정동 지점)였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성업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악기상과 악사들이 대호황을 맞이하자 수많은 악기 상인이 낙원상가로 옮겨오면서 오늘날과 같은 대형 밀집 상가가 된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노래반주기(가라오케)가 등장하면서 낙원악기상가는 침체기를 맞는다. 가라오케와 노래방의 대중화, 외환위기 이후 심야 영업시간 단축, 유흥업소 단속 등으로 악사와 밴드의 수요가 크게 줄면서 낙원악기상가의 악사 인력시장 기능은 거의 사라졌다. 낙원악기상가의 침체가 낙원동 일대의 낙후로 이어지자 서울시는 2007년 낙원상가를 철거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악기전문상가로서의 문화적 가치, 낙원상가 건물의 건축사적 의의 등이 새롭게 주목받으면서 보존과 재생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 낙원악기상가는 2013년 “보호할 가치가 있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낙원의 유래
낙원악기상가는 1970년대 이후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 낙원동이 악기와 인연을 맺은 역사는 의외로 길다. 그 연원은 구한말의 황실군악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1년 창설된 대한제국 군악대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이 낙원동의 중심인 탑골공원(옛 파고다공원)이었고, 후신인 경성악대가 파고다공원에서 정기연주회를 열며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브라스밴드(금관악기 중심에 타악기를 더하기도 하는 합주 형태)로 활약했다. 1925년 경성악대가 재정난으로 해산되자 갈 곳이 없어진 일부 악사들이 낙원동 일대에 남아 악기를 팔거나 양악 교습을 하며 명맥을 이어간 것이 낙원동에 악기상점이 생기게 된 최초의 계기였다.
1960년대 서울시는 파고다아케이드를 지어 탑골공원 주변의 피아노 노점 등을 입주시켰고, 다시 1979년 탑골공원 담장 정비사업으로 파고다아케이드를 철거하면서 피아노 가게들을 낙원상가로 이주시켜 기존의 악기점들과 함께 전문상가를 이루게 한 것이 오늘날 낙원악기상가의 출발이었다.
낙원의 사람, 낙원의 미래
역사가 40년을 넘으면서 낙원에도 젊은 2세대 주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낙원악기상가번영회 회장 유강호(50·유일뮤직 대표)씨처럼 20대 때 ‘청년 창업가’로 낙원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2세대가 있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 시아버지와 며느리, 장인과 사위가 대를 잇는 가게들도 적지 않다.
지난 40여년 동안 플루트 하는 사람 치고 안 다녀간 사람이 없다는 플루트수리점 ‘신광악기’는 둘째 며느리가, 바이올린 수리로 유명한 ‘한양악기’는 영국에서 7년 동안 현악기 수리를 배우고 돌아온 아들 최신해씨가 아버지의 명성을 잇고 있다. 1972년 문을 연 기타전문점 ‘에클레시아’는 연주자 출신인 사위 박주일씨가 역시 기타 연주자였던 장인의 바통을 넘겨받았다. 3대째가 되는 박씨의 아들도 독일에서 기타를 공부 중이라고 하는데, “아들이 전문연주자로 성공하길 바라지만, 가게를 잇는 것도 굳이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대를 이어 꾸는 꿈도 결국은 ‘음악인의 성지’로서 낙원의 미래일 것이다.
음악이 좋아 월급쟁이 길을 마다하고 24년째 낙원악기상가의 일꾼 노릇을 한다는 유씨는 낙원상가를 “단순히 악기를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문화 콘텐츠를 즐기는 곳으로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번영회가 중심이 되어 각종 악기 무료 강습, 안 쓰는 악기 기부 운동 등을 펼치고 있다. “기부받은 낡은 악기가 상가 내 일류 수리전문가의 재능기부를 통해 새 악기로 거듭나서, 평소 악기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했던 사람의 손에 들어가 아름다운 소리를 되찾고 있습니다.” 악기상들로만 구성된 세계 최초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낙원상가에서 연주회를 연다는 구상도 하고 있다. 이 또한 낙원이 음악을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들의 진정한 낙원이 되어보자는 꿈의 하나이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기타를 튕기며 상가 복도를 집시처럼 뛰어다니는 젊은이가 보였다. “저 친구요? 여기 점원. 일하다가도 악상이 떠오르면 저래요. 얼마 전에 알바들끼리 잼(즉흥연주)을 했는데 반응이 대단했지요.”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1980년대부터 대형화되기 시작한 낙원악기상가는 음악인들에게는 성지와도 같았다. 고 김광석도 무명가수 시절부터 낙원악기상가를 드나들며 자신의 선율을 만들어갔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상가 복도에 있는 이원호 작가의 설치미술 작품 ‘미소트리’. 가게 영수증에 주인의 얼굴을 넣어 상인과 손님 사이에 신뢰가 쌓이도록 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낙원악기상가번영회 유강호 회장이 음악문화복합단지로서 낙원의 미래를 설명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